상업항공의 발자취

1. 세계최초의 민항 – 비행선회사

하늘을 날고 싶다는 사람들의 소망은 태고적부터 시작됐을 게다. 해와 달은 그저 경이의 대상이었다치더라도, 날개를 푸득이며 비상하는 새들을 바라보면서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李箱)”고 느껴지지 않았으면,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도 없었을 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라비안 나이트의 양탄자, 손오공의 구름같은 것으로 상상 속에서 날기도 했고 연도 만들어 띄워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숱한 선구자들의 도전 끝에 공기보다 가벼운 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아보기에 이르렀다.

13세기초 기구에 관한 이론을 최초로 제시한 영국의 베이컨(Roger Bacon)과 공기의 부력을 이용하여 진공물체를 띄워 보려고 시도한 17세기 이탈리아의 라나(Francesco Lana), 열을 가한 공기로 기구를 날려보려했던 브라질의 구스만 등을 거쳐, 드디어 인류 최초로 유인비행을 성공시킨 사람은 프랑스의 몽골피에 형제였다.

연기가 공중으로 피어오른다는 점에서 힌트를 얻어 이들 형제는 여러번의 시행착오 끝에 1783년 6월, 자신들이 살고 있던 프랑스의 리용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직경 11미터나 되는 열기구(더운 공기로 채웠다)의 공기실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사람이 탄 것은 아니었다.

떴다. 2킬로미터의 거리를 날았다.

이어서 9월에는 베르사이유에서 오리와 닭을 태운 동물 비행실험도 성공했다.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이제 확인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는 수도 파리에서 이 위대한 실험을 계속할 수 있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같은해 11월, 마침내 유인비행 계획이 확정되었다. 사형수를 태우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역사적인 인류 최초의 기념비행에 죄수를 태울 수는 없다는 반대여론과 2명의 지원자(로지에와 다르난도)가 있어, 이들로 결정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왕인 루이 16세와 왕보다 유명했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까지 참석한 가운데 공개된 이 실험에서, 몽골피에 기구는 고도 9백50미터로 25분간에 걸쳐 약 8킬로미터나 날았다.

이러한 성공 이후, 기구를 이용한 비행은 유럽과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로 파급되면서 발전하였다. 나폴레옹에 의해 공중정찰용으로, 오스트리아 군에 의해 폭격용으로, 우편물 공수용으로도 시도되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이 기구는 기상관측용 등으로 이용되고는 있으나, 이것이 항공기 발달에 큰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추진장치가 없어 방향 조종이 불가능하여 기류에 따라 움직이게 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비행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바람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의 추진력으로 속도를 내고 방향을 조종할 수 있는 새로운 비행장치가 없을까 하는데까지 발전하였다.

여러가지 아이디어가 나오고 실험이 계속되다가 19세기말, 가솔린 엔진의 발명은 이러한 비행장치를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공기보다 가벼운 기구를 띄우되, 엔진과 프로펠러로 조종이 가능해진 비행선이 등장케 된 것이다.

최초의 비행선은 1952년 9월 프랑스의 지파르(Henri Giffard)에 의해 발명되었다. 기구에 3마력짜리 증기기관을 장치하고 프로펠러를 회전시키는 것이었다.

1872년에는 8명이 탑승하여 마치 배에서 노를 젓는 것처럼 수동으로 프로펠러를 회전시키는 인력 비행선도 등장했다.

브라질의 듀몽(Alberto Santos Dumont)은 1989년 파리에서 가솔린 엔진을 이용한 비행선을 개발, 파리 하늘을 제법 자유롭게 비행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1906년까지 그는, 14대의 비행선을 제작했으나 후일 공기보다 무거운 항공기가 미국의 라이트형제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소식에 더 이상의 비행선 제작이 무의미하다고 판단, 이를 포기하게 된다. 또한 그는 1차세계대전 중에 비행선이 군용 병기로 사용되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에 쇼크를 받고 자살을 기도했다고도 한다.

이러한 비행선들은 대부분 두꺼운 천에 수소같은 가스를 채워 넣은 것으로 골격이 없어 풍압에 따라 모양이 변하기 쉬운 연식 비행선이었다.

그러나 1900년 독일의 제펠린(Graft Ferdinand Von Zeppelin)은 알루미늄으로 골격을 만들고 그 위를 두꺼운 천으로 감싼뒤 여러개의 수소가스 주머니를 집어넣는 방식의 경식 비행선을 개발하였다. 이때문에 비행선의 대형화가 가능해졌고 모양도 틀어지지 않게 되었다. 또한 엔진을 여러개 설치할 수 있어 추력을 높일 수도 있었다. 제펠린은 1914년까지 1백여대가 넘는 비행선을 계속 제작하면서 성능을 향상시켰다.

1909년.

비행선 제작 경비에 쪼들린 제펠린은 자신이 만든 비행선으로 사람이나 짐을 수송하여 수익을 올릴 궁리를 하게 된다. 세계 최초의 상업항공회사인 도이치비행선주식회사(DELAG : Deutsche Luftschiffahrt A.G)는 이렇게 설립되었다.

당시 자본금 3백만마르크의 이 회사는, 1910년 6월부터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운영을 중단하게 된 1914년까지 만 4년동안 LZ-7 등 7대의 비행선으로 매일 평균 1편 이상의 운항을 계속했다.

20 – 25인승짜리 비행선은 본사 소재지인 프랑크푸르트와 인근 도시를 연결하는 정기운항까지 했다고 하는데 4년동안 연 비행거리 17만2천5백킬로미터, 총비행시간 3천1백여시간, 총유상여객수 1만여명, 총수송승객수 3만4천여명을 기록했다. 당시 운임은 유람비행이 50달러, 다른 도시로의 이동은 1백50달러 수준이었다고 한다.

민간상업항공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제펠린이 세운 세계 최초의 민간항공사인 DELAG사의 모기지는 프랑크푸르트의 공항 부근에 위치했는데, 제펠린하임이라고 일컬어진다. 이곳에는 오늘날,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이 세워져 있어 각종 유품과 당시의 비행선에 관계되는 자료들이 진열되어 있다.

2. 초창기의 민간항공을 주도한 F13기

1903년 12월 미국의 라이트형제가 인류 최초로 엔진장치 비행기에 의한 안정된 상태의 직선비행에 성공한 뒤부터, 1914년 세계 최초로 정기상업여객편이 취항할때까지의 10년은 근대 기계문명의 성장기였다.

사람들의 관심도 과학기술의 개발에 집중되었고 이와함께 세계 항공계도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 기상천외한 비행기들이 고안되었다가 실패하면서도 1백여종에 달하는 실용기들이 개발되었다. 비행시간과 비행거리 등 기록갱신을 위한 각축전이 벌어졌고 각종 상금이 걸린 비행대회가 비행기술의 발전을 재촉하기도 했다.

이무렵 우리나라의 형편은 어떠했나? 1900년 7월 한강철교 개통과 함께 경인선 철도가 개통된 뒤, 1905년에 경부선과 경의선이 개통되고 1910년에는 소위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돼 일제의 지배를 받는 치욕적인 암흑기로 들어섰다. 우리나라 상공에 첫번째 비행기가 등장한 것은 1913년 가을. 일본 해군기사였던 나라하라(奈良原三次)남작이 자신이 만든 4호기를 조종, 서울 삼각지 부근에 있던 용산 연병장 상공에거 첫 공개비행을 가졌던 것이다.

그 이듬해에도 같은 장소에서 일본인 다까소오씨가 두번째로 공개비행을 개최했다. 비행장이 생긴 것은 1916년 3월로, 오늘날의 여의도에 일본 육군의 간이비행장이 건설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유상비행은 1916년 10월초 용산연병장에서 일본인 오자끼씨가 당시 ‘조선물산공진회’ 요청으로 유료비행을 개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인 최초의 조종사 안창남씨가 우리나라 상공에서 처음 비행시범을 한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1922년 12월의 일이다.

우리네의 이러한 사정은 아랑곳없이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상업항공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민간항공의 활동은 거의 중단되는 상태였으나 교전국 사이에는 공중 전투비행도 벌어지는 등, 기재가 개발되고 기술도 축적되어 갔다.

1918년 종전 무렵에는 비록 전쟁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기는 하나, 각국의 항공계는 눈부신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군대를 이용해서 항공수송도 이루어졌고, 이러한 군사 항공의 잠재력은 급격히 확산되어, 종전과 더불어 남아도는 조종사와 정비사등 기술인력과 시설, 장비 등은 상업항공의 발달에 박차를 가하는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했다. 실업자가 된 기술인력과 구식 군용비행기를 활용하여 수송사업으로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찌보면 누구나 착상할 만한 일이었다.

이리하여 유럽 여러나라에서는 불하받은 군용기를 확보하여 급조한 항공사가 속출하였고 1919년에는 영,프,독 3국에서만도 무려 20개사가 넘는 군소항공사가 등장하였다. 이들 국가중에서 가장 민첩하고 활발하게 활동을 한 나라는 패전국 독일이었다.

독일은 전쟁중이던 1917년에 이미 선박회사인 HAPAG기선과 AEG 항공기제작사 및 제펠린의 비행선회사등이 공동으로 출자를 하여 DLR(Deutsche Luft Reederei)사를 설립해 놓았다. DLR사는 세계 최초의 민항으로 기록된 독일 DELAG사의 명예를 계승하듯이, 전쟁이 끝나고 나서 불과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19년 2월 5일 베를린-라이프찌히-바이마르 사이에 AEG기를 투입하여 상업비행을 시작,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 등 독일의 12개 도시를 연결했다.

자신들이 벌인 전쟁통에 입은 막심한 피해와 가혹한 베르사이유 조약 등 경제적 불안속에서도 독일은 세계항공계에 또 하나의 커다란 기여를 했다. 종래의 목제 비행기와는 달리 강도가 뛰어난 전(全)금속제 민간항공 수송기를 처음으로 개발한 것이다.

융커스교수(Hugo Junkers)가 개발한 이 F13 안제리제기는 1919년 6월에 첫 시험 비행을 했는데, 8명 좌석을 장착하고 6천7백50미터의 고공비행을 하여 상업적 민간 항공기의 시초가 되었다. 이 비행기는 금속제라는 점 외에도, 융커스 교수의 이론을 바탕으로 오토로이터가 만든 실용적 엔진을 부착했으며, 바퀴도 육상과 해상의 지형적 변화나 나쁜 기상조건에도 적응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까지 주목을 끌었다.

또한 처음으로 여객을 싣고 안데스산맥을 넘었는가 하면, 뉴기니아에서 금화를 수송하기도 했고 스웨덴에서는 응급환자를 수송하는 등 위력을 발휘했다.

이같은 현실적 경험을 바탕으로 계속 개조되어 F13기는 4인승 객실에 냉온장치를 마련하는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안락한 여행이 가능한 비행기로 호평을 받아 민간항공사업의 전망을 밝게 했다.

미국에서는 전문가를 독일의 제조공장에 파견하여 23대나 수입을 해 가기도 했다. 데사우에 있는 융커스공장에서 촉망받는 민항기 F13기 생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무렵, 독일은 1921년 5월 소위 ‘런던최후통첩’이라고 불리우는 항공기제작금지령을 받아 주로 군용기였지만 독일내의 모든 항공기 제조공장을 파괴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이에따라 7백여명이나 되던 융커스 공장의 기술인력도 1921년말에는 2백여명만 남고 뿔뿔이 흩어지기에 이르렀다.

전승국인 영,프,미 등 연합국측에서는 F13기 제작기술에 관해서도 추궁했다. 독일 기술자들은 모호한 대답만을 되풀이 하다가 소련 기술자 투볼레프에게 제작기술을 전해주고 F13기를 만들게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여러 나라의 민간회사들에게 제작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남미의 여러 민간회사와 제휴하여 F13기는 남미대륙 상공에도 등장했다. 남미에서 F13기는 기차로 몇주일이나 걸리는 고지대에 있는 라파즈비행장에도 착륙하고 코차밤바에도 내려앉아 그 성능을 인정받아 상업항공에 관심이 있는 인사들의 깊은 관심을 끌었다.

1925년에는 시속 1백40킬로미터의 개량 신예기가 베를린-하노바-암스테르담 간의 정기항공노선에 취항했는가 하면 시각비행에서 계기비행을 하는데까지 발전, 세계 민간항공기의 주도 역할을 하게 됐다.

항공기술이 이처럼 눈부신 발달을 해가는 동안에도 항공회사의 경영은 퍽 어려운 상황이었다. 수요도 많지않아 채산성이 없었던 것이다.

구식군용기를 불하받아 항공회사를 설립했다가 1년도 못돼 손을 털기도 하고 또 새로 설립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종전무렵 등장했던 항공사들중 그나마 명맥을 유지한 회사로는 영국의 AT&T사(Aircraft Transport & Travel)와 HPT사(Handley Page Transport), 프랑스의 LAL사(Lignes Aeiriennes Latecoere)와 CMA사(Campagniedes Messageries Aeriennes), 독일의 DLR사 및 BLL사(Bayrischer Luft Lloyd) 등이었다.

이렇게 되자 각국에서는 상업항공을 육성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각종 정책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3. 정부보조금까지 받는 초창기의 민항공

전쟁은 인명을 살상하고 문명을 파괴하는 인류의 죄악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 많은 변화을 가져다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급속도로 발전된 항공의 잠재력을 구라파를 중심으로 세계 여러나라에 확산시켰다. 종전과 더불어 남아도는 조종사, 정비사 등 기술인력과 시설, 기재 등을 활용한 군소민간 항공사들이 우후죽순격으로 등장한 것도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이러한 상황을 예견한 듯이 영국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이미 상업항공에 관심을 갖고 1917년 5월 ‘민간항공수송위원회(CATC ; Civil Aerial Transport Committee)를 설치, 세계 여러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식민지를 포함한 대영제국이라는 국제적 입장에서 종전의 상업항공 발전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1월에는 세계 최초로 정부조직내에 항공성을 설치하기까지 했다.

영국 최초로 등장한 민간항공사는 AT&T사(Aircraft Transport & Travel Ltd.)로 1916년 10월, 전쟁이후의 수요를 예상한 토마스씨(George H. Thomas)에 의해 런던에서 창립되었다.

군용기와 공군조종사들의 지원을 받으며 전쟁과 관련한 승객이나 물자를 수송하던 AT&T사는 1919년 8월 25일, 국제선 정기항공편을 매일 운항하는 세계 최초의 항공사로 기록된다. 이날부터 런던-파리 양 도시에서 매일 12시30분, 고정된 스케줄에 따라 취항케 된 것이다.

도버해협을 넘는 두 도시간의 비행시간은 오늘날은 1시간 이내의 거리지만 당시에는 2시간10분 –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주로 취항한 기종으로는 4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도록 민간용 항공기로 만들어진 드하빌랜드(De Havilland) DH16기.

이밖에도 군용기를 개조하여 우편물이나 화물수송을 위주로 한 DH19기, 군용 경폭격기를 개조하여 2명의 승객이 탈 수 있는 DH4A기 등이었다.

DH4A기는 잠수함처럼 동체의 위에 나있는 문을 통해 타고 내렸는데, 승객 2명이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형태였다. 그렇지만 워낙 동체가 좁아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고 하는데, 편도요금이 당시로서는 꽤 비싼 21파운드나 되었다. 비행속도나 고도도 낮아 운항중에 창문을 열 수 있는 정도였다(항공사에서 ‘비행중에 창밖으로 물건을 버리지 말아달라’는 주의사항을 팜플렛에 기입해 놓은 적도 있다).

AT&T사 말고도 영국의 유력한 항공기 제작회사인 핸들리페이지사는 당시 20만파운드를 출자하여 계열사로 HPT사(Handley Page Transport)를 설립했다. 이 항공사도 초창기인 1919년 8월부터 정기편은 아니지만 런던-파리간을 운항했다. 9월말부터는 주3회 런던-브뤼셀간을 취항하는 한편, 최초의 기내식이라 할 만한 런치서비스도 시도했다.

1919년 10월에는 선박회사인 인스톤사가 자체 인력과 서류 등의 수송을 위하여 항공수송을 시작했다가 1921년말 항공수송부서를 독립시켜 별도로 인스톤항공사(Instone Airline)를 발족시켰다. 이러는 사이에 AT&T사는 경영이 부진해져 1920년 12월 운영을 중단하기에 이르렀고 1922년 다이믈러 항공사(Daimler Airway)에 인수되었다.

한편 1919년 여름, 당시 항공상이었던 윈스톤 처칠은 ‘민항공 자문위원회’를 설치하였는데 이 위원회에서는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해서 민간항공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기도 했다. 이에따라 1921년부터 1923년까지의 기간중 HPT사, 인스톤항공, 다이믈러항공 및 BMAN사(British Marine Air Navigation)등 4개 항공사가 정부보조금을 받으며 노선 분담 형태의 경쟁에 들어갔다.

이때의 보조금 제도는 각 항공사의 수입에 관계없이 일정기간 내에 정해진 운항횟수와 운항거리의 달성을 조건으로 지급하는 방식이었으며 기재의 대부분도 무상으로 제공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각 항공사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는 못했다. 정부로서는 큰 부담이었지만 여러개로 쪼개진 영세한 항공사들 입장에서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영국정부는 또다른 위원회를 통해 의견을 수렴, 1924년 4월 1일자로 4개 항공사를 통합키로 결정, 당시 자본금 1백만파운드로 임페리얼항공사(Imperial Airways)라는 국책회사를 설립했다. 영국에서의 상업항공 발달사는 뒤에 계속하기로 하고 이무렵 우리나라를 비롯한 극동에서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

우리 민족대표 33명이 1919년 3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왜경에 의해 6천9백명에 가까운 애국지사가 살해당할 무렵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는 간디가 지도하는 1차 비폭력 저항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재미동포들은 1920년초 캘리포니아주에서 한국인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한 기구를 조직하여 40명의 동포청년을 훈련시킬 계획을 추진했다. 1대당 6천달러씩 하는 비행기를 3대나 구입하고 동포 실업인의 농장에 활주로도 닦았으며, 미국인 조종교관을 초빙하기도 했다.

또한 1921년 5월에는 안창남씨기 일본의 오구리(小栗)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일본항공국이 실시한 면허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로 기록되게 되었다.

1922년 겨울, 22세의 젊은 비행사 안창남은 동아일보사의 향토방문비행 주선으로 배를 타고 서울역(당시 남대문역)에 내렸다.

물끓듯 들이밀리는 수만의 군중들은 씩씩한 장부의 기상을 나타내는 안군을 보고 ‘안창남 만세’를 불렀다”(조선일보 1922년 12월 7일자)

12월 10일, 여의도에만 5만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안창남은, 배에 실려 운반된 금강호를 조립하여 13분동안 서울상공을 비행했다. 이날 오후 두번째의 비행에서 안창남은 동아일보사와 모국방문비행후원회의 명의로 “—– 문명의 진운(進運), 이기(利器)의 발달에 결각(決覺)하는 자는 흥하고 낙오하는 자는 망한다. 조선사람도 이 세계적 문명회전운동에 참가하여 우리의 생영(生榮)을 보지(保持)할 도리를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는 요지로 과학발달을 독려하는 선전물을 공중살포하기도 했다.

안창남의 모국방문비행사업에는 모두 6천8백원(圓)이 지출되었고 6백여원의 수입이 있어 동아일보사는 당시 6천2백원의 결손을 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행사는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한국상공비행이었으며, 하늘에 젊음을 걸고자 하는 청소년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우리 과학기술 발전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자랑스러운 행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항공’은 세계 여러나라에 비하여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침략자로서 서슬이 퍼렇던 일본에서는 바로 그 1922년에 일본 항공수송연구소라는 명칭을 내건 민항공이 태동했고 1923년 1월에는 도오사이(東西)항공이 설립되어 도쿄-오사카 구간의 영업을 개시했던 것이다. 우리의 상업항공은 아직 회임도 하지 않았던 무렵이다.

4. 미국의 우편 비행시대

유럽 여러나라에서 상업항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정부보조금까지 지원되고 있을 무렵, 오늘날 항공대국이 된 미국의 상황은 어떠했나?

라이트형제의 성공적인 비행기록이나 세계 최초의 정기편 항공사인 STA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미국은 우편물 수송의 민항공 이용이라는 역사를 이룩한 나라이기도 하다.

미국 체신부는 이미 1916년경부터 우편물의 항공수송을 구상하고 있었다. 1918년 5월 1일부터는 육군항공대의 협조를 받아 연간 10만달러 규모의 예산으로 뉴욕-워싱턴 사이의 시험운항을 시작, 항공사(航空史)의 꽃으로까지 불리운 ‘우편 대비행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시험운항 노선을 단계적으로 늘려가던 체신부는 2년후인 1920년 9월 뉴욕을 출발하여 시카고 경유, 샌프란시스코 구간을 잇는 대륙횡단항공로를 개척했다. 당초에는 낮에만 비행하여 이 노선 운항에 3일이나 걸리는 형편이었지만 유럽 여러나라들과는 달리 우편수송의 기반을 닦는 일에 우선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성과로 기록할 수 있다.

이무렵 특이한 여객편이 생겼는데, 1919년 7월부터 시행된 금주법(禁酒法)의 결과이다.

대도시간의 수송도 아니고 플로디다와 바하마의 내소, 쿠바의 수도 아바나 사이를 연결하는 노선이 개설된 것은, 미국의 플로리다와 인접한 영국령 바하마제도나 쿠바가 애주가들의 천국으로 각광을 받았기 때문이다. 기민한 상술을 발휘, ‘아에로’라는 회사에서 재빨리 커티스HS-2비행정을 듸웠는데, 선박보다 시간이 5분의 1정도 밖에 소요되지 않아 당일로 돌아올 수 있게 돼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끄는 등 히트를 쳤다.

하이블 익스프레스’라는 별명까지 붙은 이 카리브해의 노선은 “한잔 하는데” 눈이 어두워진 애주가들로부터 편도운임을 75달러씩이나 받았다. 여기에 눈독을 들인 몇몇 경쟁사가 등장, 미국 동부의 여러 도시에서도 여객수송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때 이 시기의 미국상업항공은 영국,독일, 프랑스에 비해서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비행기의 장래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갖고 있던 체신당국에 의해 북미대륙횡단의 우편비행이 30시간으로까지 단축되었다. 무선은 커녕 항공용 등대 하나도 없었던 시절에, 비행장과 이착륙 코스에 횃불을 비쳐 표지로 삼는 등의 원시적이지만 저돌적인 방식의 운항 덕분이었다. 우편비행에 사용된 비행기는 1-2인승의 단발복엽기로, 조종사들은 가죽 비행복에 고글처럼 생긴 안경을 쓴 멋쟁이 차림으로 조종석에 앉았고 비행기도 어깨 윗부분은 열려 있는 개방식 좌석이었다.

이때의 조종사들은, 물론 승객을 싣지 않아서였겠지만, 곡예비행에 가까운 무리한 비행을 해내고 자랑을 늘어놓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게다가 체신당국에서는 비행조건이나 기상에 대한 지식도 없이 무리한 운항을 종용하기도 했다. 조종사들과 알력도 심해, 1919년 7월에는 짙은 안개를 무릅쓰고 출발을 강요받은 조종사가 이를 거부하다가 해고를 당했는가 하면, 이에 항의하여 다른 조종사들이 파업을 하기도 했다. 이 파업은 또한 조종사 최초의 집단 파업으로 알려져 있다.

국영 우편비행은 약 9년동안 계속되었는데, 총비행거리 2천5백만킬로미터에 수송한 우편물도 3억통에 이르는 눈부신 실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무리한 운항 탓으로 이 기간중 2백회 정도의 추락사고가 있었고 8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우편비행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체신당국에서는 이것을 민영으로 이관키로 결정했다. 그러나 채산성이 문제였다. 보조금을 지급하려 했으나 시민들의 세부담에 대한 반대여론을 의식, 직접 보조방식을 채택하기는 곤란했다. 결국 생각해낸 것이 운반한 우편의 무게에 따라 일정한 요금을 지불하는 간접 보조방식이었다. 아울러 1925년에 ‘항공우편법’을 제정하여 이를 제도화하였다.

이것은 세계 항공계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유럽 각국의 정부보조금 지급을 공권력의 간섭형식이 아니라 기업자유를 존중하는 미국식의 독특하고 유연한 방식으로, 연간 수백만 달러의 특정업종 보조로 육성해 나갔던 것이다.

실제로 1926년 2월부터 사카고-디트로이트 구간의 운항을 시작한 포드사(Ford Motor Co.)를 필두로, 이 유리한 보조금을 얻기위해 밀어닥친 항공사 중에서 우선 선정된 12개사와 계약을 맺고 각기 우편수송을 개시했다.

1927년 1월에는 이때까지 정부직영으로 남아있던 대륙횡단노선도 민영화를 위한 입찰을 실시, 뉴욕-시카고 구간은 내쇼날항공사(National Air Transport)가, 시카고-샌프란시스코 구간은 보잉사(Boeing Air Transport)가 각각 담당하게 되었다.

이 민간 우편 비행은 아주 순조로왔고 항공사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초기 2년동안만해도 3천7백만통의 우편물이 수송되었고 운항률도 95퍼센트나 되었다. 또한 이동안 지급된 5백만달러의 보조금은 그전까지 적자를 냈던 항공사의 자금상황을 호전시켰다. 나중에는 이권화까지 되어 한차례 뇌물파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민간 우편비행이 활성화는 부수적으로 항공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우편비행조종사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의 대서양 무착륙 횡단비행성공은 자본시장에서의 항공산업에 대한 관심을 끌어모으는데 커다란 작용을 했다.

로버트슨이라는 작은 항공회사의 조종사로 부지런히 우편수송을 하던 24세의 젊은 청년 린드버그가 느닷없이 뉴욕-파리간 5천8백9킬로미터의 무착륙비행을 해낸 것은, 단순히 무명인사 한 사람을 영웅으로 탄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목을 비행기로 끌어들이고 그 위력과 안전성을 강하게 심어주기도 했던 것이다.

1927년 5월 20일, 무선장치도 없는 1인승 라이안(Ryan) NYP기를 몰고 단독으로 비행시간 33시간30분을 기록한 이 대서양횡단은 항공사상 최대의 쾌거로서 미국 항공산업발전의 결정적 기록체가 되었다.

우편비행에 더부살이처럼 끼어 생색도 못내던 여객수송도 덕분에 활기를 찾았다.

최근까지지 소위 ‘빅포(Big Four)’로 불리운 – 아메리칸항공(AA), 이스턴항공(EA), TWA항공(TW), 유나이티드항공(UA) – 미국의 4대 항공사의 전신이 모두 1928년부터 1930년에 걸쳐 설립된 것이다.

5. 본격적인 여객수송시대의 개막

미국에 4대 항공사가 등장한 1928년부터 1930년까지의 기간은 본격적인 여객수송이 개막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1928년 한해동안 6만명 정도의 승객이 있었고 1930년에는 무려 50만명을 넘어섰으며 미국 항공사들이 보유한 비행기도 5백대 이상이나 되었다.

4-10인승의 소형기여서 객실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민망한 정도였지만 점차 8-14인승의 큰 기종도 나타났다. 비교적 넓은 스페이스를 가진 이 신형기의 내부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각각 1열씩의 의자가 배치되었고, 인테리어 개념도 도입되어 산뜻한 모습을 갖추었으나 비행소음과 진동은 여전히 심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신형기는 포커7, 포커10, 스틴슨 6000, 포드 트라이모터, 보잉80, 커티스 콘돌 등의 쌍발기 또는 3발기였는데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보잘 것 없으나 그 이전의 기종에 비교해보면 큰 진전을 이룬 것이었다.

1920년대에는 항공여객이 늘어나면서 하드웨어 뿐만 아니라 서비스와 같은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1919년 10월 네덜란드 최초의 민간항공사로 출범한 KLM(Koninklijke Luchtvaart Maatschappij)이 이 분야에서는 선두주자 역할을 했다.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런던, 함부르크 등을 연결하던 KLM은 1921년 5월 민항공 사상 처음으로 항공예약을 시작했는가 하면, 항공기 발착지에서 음료수를 제공하기도 하고 음식점도 설치하는 등 여객서비스를 시작했다. 기내 환기장치와 산소호흡장치 등도 KLM에 의해 사상 최초로 이루어졌는데 1925년에는 기내에 냉방설치를 시도하기도 했다.

오늘날 ‘항공여행의 꽂’처럼 보편화된 스튜어디스는 1930년 미국에서 첫 선을 보였다.

당시 미국의 항공사 경영자들은 비행기 추락사고와 신문의 대서특필로 승객이 감소해 불황에 허덕였고 조종사들은 별도로 기내서비스를 맡은 승무원들이 없어 기내청소나 운항중 승객을 보살피는 역할까지 담당을 하게 돼 짜증을 내고 있던 실정이었다.

이무렵 간호사 자격을 갖고 있던 엘렌 처치(Ellen Church)가 보잉항공사(Boeing Air Transport : 후일 UA와 통합됨) 스팀프슨 사장을 찾아가 기내에서의 서비스를 맡겠다고 제의했다. 스팀프슨 사장은 한마디로 거절했지만 처치는 “여자가 기내에서 일을 하면 남자들도 비행기 타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스팀프슨 사장을 설득했다.

결국 3개월간 시험탑승을 하기로 하여 엘렌 처치는 세계 최초의 스튜어디스로 기록되었다.

이때 보잉항공사에서는 엘렌 처치로 하여금 7명의 스튜어디스를 모집하도록 했는데, 간호사 자격이 필수조건이었다. 아울러 스튜어디스의 조건으로는 25세 미만의 쾌활한 성격의 미혼여성이어야 하며, 키는 5피트4인치(162.5CM), 몸무게는 1백15파운드(52.5Kg)이하여야 했다. 비행기의 중량제한 때문에 몸집도 작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 시절 스튜어디스들은 기내서비스 외에도 연료급유, 고도계 점검, 승객들의 수하물 운반, 객실 청소까지 맡아야 하는 중노동을 해야 했는데 비행기가 예정대로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간이비행장에 내릴 경우 승객들의 숙소까지 알선하는 일도 맡아야 했다.

구미 각국에서 본격적인 상업항공이 그 뿌리를 넓힌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도 민항공 노선이 개설되었다.

대륙진출의 교두보로서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일본은 유사시에 활용할 비행장을 건설했고 세계적인 여론을 의식, 민항공사업을 간판으로 내걸었다. 1916년 가을 조선군사령부에 의해 맨처음 건설된 여의도 간이비행장에 필요한 시설을 보완한뒤, 1929년 4월 1일 평양, 대구, 신의주, 함흥, 청진, 울산 등과 함께 정식 비행장으로 개장하였다.

이날 일본항공수송주식회사는 도쿄와 중국의 대련(大連)을 잇는 정기항로를 개설하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너무 장거리여서 직항운항이 곤란했기 때문에 도쿄-후꾸오카-대구-서울(여의도)-평양-신의주-대련을 운항하는 방식이었다.

일본항공수송(주)은 한국내의 중간지점을 연결하는 노선을 개설한 후, 거의 매일 1회 왕복을 하며 우편물과 화물을 수송했다. 점차 업무량이 늘어나자 이 회사는 지금의 서울 소공동 부근에 영업소를 설치하는 한편, 여의도와 대구, 평양, 신의주, 울산비행장 등에 지소나 출장소를 설치, 여객수송에 대비하였다.

이어서 9월부터 후꾸오카-울산-서울-평양-대련 구간에 승객 6명이 앉을 수 있는 포커 슈퍼 유니버셜 수송기를 투입하여 매일 1회 왕복하며 여객수송을 시작했다.

한편 항공노선 개설에 앞서 이 땅에서 항공사업이 시작되기도 했는데 1925년 12월 일본인 니시오(西尾三郞)가 설립한 ‘조선항공연구소’가 그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재정지원까지 했는데, 정기항로 개척을 위한 시험비행과 어군탐지를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 연구소는 1927년 경남,북 연안에서 어군탐지비행을 했는가 하면 1931년 이후에는 서울-함흥-혜산진 간 정기화물, 우편수송과 서울-함흥 간 여객수송 비행도 했다.

한국인으로서 신항공 사업의 창시자는 이기연(李基演). 그는 안창남보다 1년 뒤인 1923년부터 1925년까지 3회에 걸쳐 국내에서 비행시범을 보였던 비행사 출신이었다. 이기연은 1926년 서울에 경성항공사업사를 창설하여 한국인 최초로 항공사업을 일으켰으나 이렇다할 업적을 내기도 전에 1927년 9월 10일 경북 점촌에서 곡예비행 시범을 보이다 엔진고장으로 추락사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한국 민항공의 창시자로 기록되고 있으나, 또한 한국 항공사상 최초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인한 첫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인에 의한 한국땅에서의 첫 항공사업이라는 의미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사안인 것이다.

6. 식민지 진출과 국책항공사의 발전

아시아 지역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1920년대 말부터 이 지역 진출에의 경쟁을 시작하였다.

영국의 임페리얼항공은 1927년에 이미 카이로와 중동의 바스라 간을 정기운항하고 있었으며, 네덜란드는 1931년에 KLM과 인도네시아의 KNILM이 협력하는 방식으로 암스텔담-바타비아 간의 여객수송을 개시했다. 프랑스는 1931년 에어 오리엔트가 파리-사이공 간 우편수송을 개시했다가 에어 프랑스가 설립한 후 하노이와 홍콩에 여객수송을 실시했다.

아시아 다음의 목표는 아프리카였다.

영국의 임페리얼항공은 1932년에 카이로-케이프타운 노선을 개설한데 이어 이탈리아의 알리탈리아는 로마-아디스아바바 간을 운항했다. 벨기에에 기반을 둔 사베나항공은 브뤼셀과 킨샤샤의 레오폴드빌 노선을 개설했다. 식민지역과 노선망의 확장이 정비례 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외에 유럽의 열강들이 눈독을 들인 곳은 남미지역이었다.

처음에는 대서양을 횡단할 만큼의 항속거리가 불가능하여 선편으로 아프리카와 남미의 동북해안을 연결하여 항공과 선편을 연계시키는 형태를 취했다. 1928년부터 프랑스의 CCA, 1930년부터는 독일의 DLH 등이 이러한 방식으로 이 노선을 운항했다. DLH사에서는 대형 캐터펄트(Caterpult)를 갖춘 전용선을 대서양의 중간 지점에 띄우고 여기까지 날아온 수상기에 연료를 보급해서 목적지로 보내는 방식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와는 별도로 독일의 DZR사(Deutsche Zeppelin Rederei)는 항속성이 뛰어난 비행선으로 1932년부터 독일의 스튜트가르트와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 간의 여객수송을 개시했다. 당시 이러한 노선에서 채산성이 있을리는 없었다. 결국 국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 항공사업의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여객을 위한 서비스 개념까지 도입돼 있었음에도 항공수송이 적자사업이라는 것이 어느 나라에서건 아예 상식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노선개척에 따르면 시행착오의 역사가 기재개발과 운항기술의 진보를 촉진한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무렵에 등장한 신형기로는 보잉247기 및 DC-2기 등이다. 1933년과 1934년에 걸쳐 등장한 이 새로운 여객기들은 바퀴를 기체에 접어 넣을 수있는 참신한 기종이었지만 동체가 좁아서 객석은 14석 밖에 안되었다.

그런데 아메리칸항공과 더글라스제작사간에 DC-2기의 동체에 침대를 설치할 것을 협의하다가 객실의 폭을 60센티미터 가량 넓히는 방안이 검토되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하게 된 비행기가 DC-3기인데 침대 대신 좌석을 설치하면 한줄이 더 늘어나 21석까지 가능해져 항공사들의 인기 기종이 돼버리는 뜻밖의 수확을 거두게 돼, 당시로서는 가장 뛰어난 호화기종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의 항공기술로는 30명 이상을 탑승시켜 장거리를 날 수 있는 항공기의 개발은 용이한 실정이 아니었고 기술적으로는 오히려 비행정의 개발이 손쉬웠다. 활주로의 제한을 받지 않는 비행정은 기체의 대형화가 비교적 용이했고 고장으로 불시착을 하더라도 위험이 덜할 수 밖에 없어 당시 바다위를 날으는 장거리 코스에서는 거의 비행정이 이용되고 있었다.

팬암항공이 태평양과 대서양 횡단항로를 개척한 초기의 파이어니어 역할을 한 것도 이 비행정들이었다. 1927년 3월에 미국의 플로리다에서 조용히 문을 연 이 시골 항공회사는 정부의 지원과 트리프 사장의 탁월한 경영능력으로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카리브해와 남미일주노선을 완성하는 등, 항공업계의 기린아로 급부상했다.

팬암이 남미에 진출한 것은 다분히 독일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1920년대 후반 독일자본에 의한 항공사들이 잇달아 남미로 진출, 뒷문으로 침입당하는 느낌을 받은 미국 정부에서 대항책으로 팬암으로 하여금 중남미 진출을 하도록 독려했던 것이다.

팬암에서는 계열회사인 파나그라(Panagra)항공과 협력해 2년도 채 안되어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였다. 멕시코와 남미 북쪽 해안도시를 경유하는 카리브해 일주노선과 마이애미로부터 남미대륙의 동서 양쪽 해안도시를 따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합쳐지는 2개의 노선 등이 모두 1931년 이전에 팬암이 개설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8개의 현지 회사를 흡수 또는 계열화하고 현지 정부의 반대를 무마해 가면서 합법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확보, 독일 세력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팬암의 성가는 높아갔고 미국 정부의 전면적인 지원 밑에 장거리 해외노선을 독점하다시피하는 국책항공사의 노릇을 하게까지 되었다.

1927년도에 겨우 1백10마일의 노선을 운항하던 플로리다의 조그만 항공사가 불과 3-4년만에 임페리얼, 에어 프랑스, KLM, DLH 등과 어깨를 겨루는 국제항공사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팬암의 주력기종은 비행정이었다.

팬암이 1931년부터 카리브해 노선에 취항시킨 시콜스키-40 4발 비행정은 객실 통로 양쪽에 칸막이식 좌석이 줄지어 있는데, 이 콤파트먼트 속에는 2인용 소파가 마주 놓여 있었다. “하늘을 날으는 살롱”이라는 당시의 구호에 상당히 근접해 있던 셈이다.

그후에도 팬암은 조금씩 기능을 향상시킨 비행정을 이용,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여러 섬들을 징검다리처럼 거쳐 마닐라까지 4백5일만에 도착하는 태평양노선을 1936년에 개설하는 등, 태평양은 그야말로 팬암의 독무대처럼 되었다.

뉴욕-버뮤다 구간을 S-42 비행정으로, 다시 1939년부터는 더 큰 대형 비행정인 보잉 314 기종으로 뉴욕-아소레즈-리스본-마르세유-사우댐프턴 구간의 정기노선을 개설한 것이다. 팬암이 꿈꾸던 세계일주노선망이 눈앞에 닥쳐 오는 듯했으나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7. 1930년대 한반도 주변의 상황

1917년 소련의 페테로그라드(지금의 레닌그라드)에서는 볼셰비키 무장봉기가 일어나 케렌스키 정부가 전복되고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다. 10월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이 혼란한 정세속에서도 소련은 1918년 말, 항공과학 연구를 위해 쓰아기(Tsagi)라는 연구기관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항공공업인민위원회를 조직해 놓았다. 그로부터 3년 뒤에는 독일의 지원을 약간 받기는 했지만 비행기를 시험제작까지 했다.

그 이듬해인 1922년에는 독일과 공동으로 데루루프트(Deruluft)사를 설립, 독일과의 국제노선 하나를 운영하기도 했다.

소련의 독자적인 항공사는 1923년에 설립된 도브로레트(Dobrolet)사인데, 형식상으로는 민간기업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완전히 국가관리였다. 어쨌든 이 항공사는 모스크바-고르키, 키에프-오데사에 이어 1927년부터는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몽고, 파키스탄까지 운항지역을 확장했다.

이밖에도 지역항공사 개념의 우크라이나사와 카프카즈사가 있었는데 이 두 회사는 1925년에 통합되었다가 1929년에는 다시 도브로레트사와 합쳐져 국영 도브로플로트(Dobroflot)사로 발족하게 되었다. 이 항공사가 1932년에 아에로플로트(Aeroflot)로 이름을 바꾸고 오늘의 소련항공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소련항공은 이때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톡을 잇는 당시 국내선으로서는 세계 최장거리인 1만킬로미터의 노선에서 영업을 개시했는데, 4일간이나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노선 이외에도 아에로플로트는 11개의 지방사무소를 개설하고 레닌그라드, 오데사, 사할린, 시베리아 동쪽 등 거의 소련의 전 영토를 연결하는 항공노선망을 완성, 규모면으로는 세계 최대의 항공사로 부상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1921년에 중국항공이 북경-제남 간의 노선을 개척했고 일본의 민간항공사들이 진출하기도 했으나 특히 주목할만한 것으로는 독일, 미국, 소련 등의 경쟁이다.

1920년대 말부터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과 접촉을 시작한 독일은 1930년 45퍼센트의 출자를 하여 중국과 구아항공공사(歐亞航空公司)를 설립했다. 미국 역시 같은 해에 똑같은 비율의 출자로 중국항공공사(CNAC)를 설립해 놓았다. 중국항공공사는 후일 일본이 중국대륙을 침략하자 군수물자 수송이 주업무가 되기도 했다.

1936년에는 일본 육군이 혜통(惠通)항공공사를 설립하여 화북지역을 운항하고 2년뒤에는 중화항공주식회사가 등장, 일본 점령지역의 수송을 전담하는 역할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1929년에는 소련과 공동출자한 서북항공공사도 설립되는 등 중국은 항공역사의 초창기에 외세의 침식에 대륙을 맡겨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한반도의 상황은 몇몇 선각자들의 개척자적 노력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한국 민항공의 창시자인 이기연씨에 대해서는 이미 다룬 바 있지만, 그 후에도 일본에서 항공술을 체계적으로 익힌 신용욱씨라는 분은 사재를 털어 조선비행학교를 세워 1930년에 미국에서 비행기를 들여와 비행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일본에서 만든 4인승 비행기를 들여와 1930년부터 유람비행 사업을 벌였다. 서울상공이나 인천까지 다녀오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한국땅에서 한국인에 의해 승객을 태우고 유료비행을 한 첫번째 기록이 되는 셈이다.

탑승요금은 10분간 서울 상공을 둘러보는 것이 5원이었고 인천까지 20분만에 다녀오는 것은 10원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쌀 한가마 값이 12-14원이었다고 하니 어마어마하게 비싼 요금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나고야 비행학교를 고학으로 졸업한 김영수(金永修)씨도 1939년에 조선항공연구소를 설립했으나 신용욱씨와의 주도권 쟁탈에서 패배, 해방 전 해에 문을 닫고 말았다.

신용욱씨는 1935년에 유람비행 사업을 중단하고 비행학교와는 별도로 1936년 10월, 조선항공사업사를 세워 서울-이리 간의 정기 항공로를 개설한뒤 광주까지 연장하기도 했고 유람비행과 어군탐지사업을 벌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신용욱씨는 해방 후인 1946년 10월 대한국제항공사를 세웠다가, 다시 1948년에는 대한국민항공사를 세우는 등 초창기 한국민항의 태동에 큰 역할을 했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해방전부터 화신백화점 사장으로 널리 알려졌었던 박흥식(朴興植)씨도 항공과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다. 박흥식씨는 1944년 10월 당시 자본금 5천만원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안양에 세웠다. 또한 박흥식씨는 제주도의 땅을 불하받아 조종사 훈련장으로 꾸밀 계획도 세워 놓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 돌투성이의 황무지여서 개척할 엄두도 못내고 묵혀 두었다가 후일 한진그룹에 넘기고 말았다.

한진그룹의 조중훈(趙重勳)회장도 처음에는 일본의 협조를 받아 이 땅에 조종사 훈련장을 만들려 하다가 당시의 한일관계 사정으로 우선 목장으로 개간했었는데, 땅 한평에서 돌 한 트럭을 실어내는 식의 엄청난 투자와 노력끝에 초지를 일구었다고 한다. 이 땅이 지금의 제동목장 부지로 그 한쪽에는 당초 조중훈 회장의 의도했던 바대로 대한항공 비행훈련원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 유일의 민간조종사 자체 양성장인 셈이다. 반세기의 세월이 흐르고 소유주가 바뀌었는데도 그 땅이 결국은 애당초의 의도대로 조종훈련장으로 쓰이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아무튼 이처럼 한국에서의 민간 항공은 국가나 제도적인 뒷받침에 앞서서 개척자적 사명감을 가진 극히 소수의 선각자들에 의해서 그 터를 닦아 왔음은 분명하다.

8. 2차세계대전과 민간항공

기계문명이 발달하고 식민지의 확장을 위한 열강들의 경쟁이 치열해져 감에 따라, 강대국들은 군비의 강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차세계대전을 통하여 공격력과 기동력을 갖춘 전쟁 무기로서의 가능성이 시험된 항공력을 증강시키기 위한 관심도 대단했다.

항공수송 자체가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 실용적인 교통수단으로서 보급되기 시작한데다 어느정도 채산성도 기대해 볼 수 있는 시기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이러던 중,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국책항공회사로서 군부와 일체관계에 있던 독일, 이탈리아 등의 항공사들은 전시체제로 전환되었다.

일본과 한국 땅에 있던 모든 민간항공기도 군용기로 징발되었다. 모든 항공시설도 군사시설로 전환되었다. 민간항공이 곧 예비공군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 예비공군으로서의 민항공>

이탈리아는 알리탈리아항공사가 특별항공대란 조직에 흡수되어 군사수송을 담당하였다.

독일의 DLH사는 비록 군사수송이 전부이기는 했으나 그 조직은 그대로 남아, 독일의 점령지역이 넓어짐에 따라 유럽지역을 누비기도 했다. 중립국이었던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는 영국의 BOAC나 미국의 팬암이 DLH사의 항공기와 조우하기도 했다.

독일에 점령 당한 프랑스의 에어프랑스 항공기 대부분과 시설은 DLH에 접수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역으로 소개되어 ‘자유프랑스’ 정부에 협력하여 군사물자 수송을 맡기도 했다.

네델란드의 KLM도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항공기재를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로 소개시켰는데, 일본군이 자바섬을 점령하게 되자 재빨리 뉴욕으로 대피시켜 미군의 태평양작전에 협력했다.

노르웨이의 DNL항공사도 항공기재의 일부를 영국으로 옮겨 연합군에 협력을 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 지중해를 봉쇄 당했던 영국의 BOAC는 호주의 콴타스항공사와 협력하여 아프리카 동해안-인도양-시드니를 연결하는 새로운 노선을 개설하였다. 이 노선은 영국 본토를 출발하여 아프리카 서해안을 돌아온 항공편과 나이로비에서 연계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말레지아 침공에 따라 이 운항은 중단되었고 콴타스항공이 호주와 파키스탄을 연결하는 새 항로를 개척하여 카라치에서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부활되었다.

< 두각을 나타내는 미국>

미국의 민간항공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도 이 2차대전 이후이다.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소용돌이의 중심부에서는 좀 떨어져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다가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은 전쟁 속에서도 국내선의 운항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사수송이 우선이기는 했으나 일반 상업수송도 그대로 병행되었다. 군에 징발되고 남은 소수의 항공기로 격증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 항공기의 가동시간을 늘렸다. 전황에 여유가 생기고 생산이 풍부해지면서부터는 항공사의 수송능력이 군의 요구를 충족시키고도 남아 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노선이 개설되기까지 했다.

수요도 크게 늘어 1943년에 300만명, 44년에는 400만명에 달했다.

국제선도 태평양노선은 중단되었지만 1940년에 개설된 뉴욕-리스본 간의 대서양노선은 정부관리하에 팬암의 운항이 계속 허용되었다.

또한 해군의 지원을 받아 AEA(American Export Airlines)사가 아일랜드에 취항하기도 했다.

미국의 민간항공사들 역시 전쟁 지원에 많은 역할을 했다. 연합국들의 항공사들과 대수송편대를 이루어 유럽과 아프리카는 물론 인도, 중국 및 태평양상의 여러 섬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역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이 전쟁중에 발달한 항공기 제작기술과 장거리 항법은 또한 전쟁후의 민간항공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전쟁과 평화가 서로 상부상조를 했다고나 할까?

팬암의 경우 리베리아, 카이로, 캘커타, 카라치 등 수많은 전선부근에까지 수송작전을 감행했다. ‘캐논볼 익스프레스’ 작전이라는 명칭까지 붙은 수송에 당시로서는 80시간이라는 놀랄만큼 빠른 시간에 모든 전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군에 협력한 각 항공사들은 그 대가로서 더욱 빠르게 멀리 날면서도 안전하게 운항하는 항공기를 제작하거나 항공술을 익혔고 대륙간 수송을 현실화하는 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 전쟁과 평화의 상부상조>

세계대전 중 중립국의 항공사들이라고 해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스위스는 아예 운항을 중단했고 핀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은 운항을 계속하기는 했으나 취항국의 전황과 연료사정 등으로 불안정하기는 매일반이었다.

비교적 안정적인 발전을 계속한 것은 스웨덴의 ABA(Aktiebolaget Aerotransport)사다. 전쟁중 베를린,모스크바, 런던 등을 운항하던 이 항공사는 전쟁후에 대비해서 스칸디나비아 3국과 합동으로 미국을 취항할 것을 구상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준비작업으로 탄생된 것이 1943년에 창립된 SILA(Svensk Interkontinental Lufttrafik)사이다. 이 회사가 오늘의 스칸디나비아항공사(SAS ; Scandinavian Airlines System)의 모체인 것이다.

< 국제민간항공조약의 채택>

아뭏든 2차세계대전은 항공기술의 획기적인 진보와 함께 시속 350킬로미터 이상되는 성능과 장거리 비행, 항공기의 대형화로 운항의 경제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더하여 항공수요도 증가하는 상승작용을 통하여 항공수송은 새로운 교통수단으로서 그 지위를 확고하게 굳히게 되었다.

또한 이 전쟁이 종말에 접어든 1944년 10월, 미국은 전쟁후의 국제민간항공수송과 관련한 여러 문제들을 의논할 것을 제의, 55개국 대표를 시카고에 초청하였다.

그해 11월 1일 개최된 시카고 회의에는 실제로 52개국 대표가 참가하여 한달만에 소위 ‘시카고 조약’이라고 불리우는 ‘국제민간항공조약’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 조약은 국제항공을 안전하고 건전하게 발전하고 기회균등의 원칙하에 경제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일정한 규범과 원칙을 마련한 것으로 의의가 있다. 특히 이 조약의 1947년 발효와 함께 ICAO(국제민간항공기구 ; 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가 설립되어 UN산하의 전문기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9. 국가의 주요기간산업으로 등장한 상업항공

여섯해동안이나 끌었던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우리나라의 해방을 안겨다 주고 마침내 끝을 맺었다. 세계질서는 재편되고 나찌즘이나 파시즘, 군국주의와 같은 절대주의와의 대결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냉전장으로 변했다.

민간항공 분야도 새 시대를 맞았다.

항공수송량도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1944년 시카고회의에 의해 탄생된 ICAO와 새로운 민간항공조약 등에 크게 고무된 분위기였다.

뿐만 아니라 전쟁중 막대한 전비를 투입하여 만들어진 항공기와 비행장 등이 부산물로 남게 되었고 기술의 축적 또한 막대한 것이었다.

< 해운의 시대에서 항공의 시대로>

이제 항공운송사업은 국위선양이나 교통수단 만이 아니라 국익에 직결되는 국가기간산업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되어 세계 각국에서는 자국 민항의 발전을 위해서 정책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50년대부터는 대륙간 여행의 주요 수단이 해운이 아니라 항공으로 전환되었고 국제간의 주요 간선 노선이 개발되어 여행자들은 항공사를 선택할 정도까지 되었다.

그러나 종전 직후의 상황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유럽은 전쟁의 상처를 씻기엔 너무나 지쳐 있었고 독일의 패전으로 DLH사는 함몰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영국과 불란서, 화란 등 3개국을 필두로 종전후 수개월이 지난 뒤 운항을 재개, 명맥을 이었다.

화란의 KLM은 인도네시아와 대서양 노선 운항을 다시 시작하였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으로 위기에 부닥치자 현지 자회사 KNILM를 인도네시아와 공동 소유하는 가루다항공사로 재빨리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프랑스는 1946년에 에어프랑스를 재건하여 유럽노선 강화는 물론, 대서양노선에서의 기반 구축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 시행착오 거듭한 영국의 항공정책>

영국은 1946년에 새로운 민간항공법을 제정하는 등, 강력하고 효과적인 항공정책을 수립하여 2차대전 후 미국에 버금가는 항공대국으로 성장하는 계기로 삼았다.

종전 직후 항공사업의 특성상 국익과 밀접한 관련이있다는 점을 간파한 영국정부는, BOAC의 발전에 초점을 맞추었다.

BOAC는 영국이 자국 항공의 육성과 발전을 위하여 1939년에 임페리얼사를 발전적으로 개편하여 설립한 국책회사로, 여기에서 분리된 BEA(British European Airways)는 국내 및 유럽 지역내의 수송만을 담당하도록 제한시키고 BOAC는 그러한 제한이 없이 장거리 국제노선을 비롯, 전세계 각국에 대한 정기항공노선의 독점적 운항권을 부여받았다.

그후 1972년에는 국제항공에 있어서 대형항공사간의 복수화체제를 도입, BOAC와 BEA를 합병한 BA(British Airways)와 제2민항인 BCAL의 경쟁을 유도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오래가지 못하고 1976년에 다시 “미래의 민항정책”을 발표, 사업영역을 재조정하였다.

이 새로운 정책은 영국 항공사간의 무모한 경쟁을 배제하고 자국 항공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질서있는 경쟁을 꾀해 육성코자 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즉, 항공사의 신규 면허는 서비스 향상과 수익성 확보가 가능한 경우에 한하여 부여하고, 장거리 국제선은 1노선 1사, 근거리 국제선과 국내선은 런던노선 등과 같이 충분한 수요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1노선 복수사 운항을 인정키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영국정부는 장거리노선에 있어서 BCAL의 복수취항(더블 트랙킹)을 중지시키는 등 방만한 노선을 정리 통합시켰다. 또한 이것은 석유파동으로 비롯된 제2민항 BCAL의 경영수지 개선을 위해 도움이 되기도 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영국의 항공정책은 또 한차례의 변화를 갖게 되었다.

그간 BA의 독점노선이었던 런던-홍콩간의 국내선(홍콩이 영연방에 속해 있으므로) 구간에 BCAL과 CPA의 취항을 허용했고 1984년에는 버진항공사에 런던-뉴욕간 노선 면허를 내주었다. 복수화체제를 다진 것이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국제노선에서 자국 항공사간의 복수취항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철저하게 금지하는 방식으로 자국의 국제경쟁력 약화를 막았다.

< 자국항공력 강화 위해 전력투구>

그러나 이 복수화체제도 1988년에 이르러서는 백지화되고 실제적으로 국제선 1원화체제로 환원되고 만다. 미국의 거대한 항공사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자국항공사의 규모의 확대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분산된 항공력의 통합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영국항공은 수년간 JAL에 빼앗겼던 국제선 수송실적 1위의 자리를 차지했다.

10. 제트시대의 도래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항공업계의 가장 큰 여건변화는 기술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항공기 제작기술의 진보는 항공운송사업자들을 당황하게 할 정도로 가속화되었다. 항공기의 감가상각 기간을 훨씬 앞지르는 빠른 속도로 새로운 형의 항공기가 탄생하였다.

새로운 엔진 개발, 안락하고 넓어지는 객실 구조 등, 점차적인 변화가 아니라 획기적인 진보가 이루어지다 보니 이 무렵의 항공사들은 구형 항공기의 대체에 허덕이며 경영수지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항공기종의 급속한 발전과 항공 대중화>

이 무렵의 주요기종은 아직 프로펠러기였지만, 이것만으로도 세계대전의 상처를 씻어가며 상업항공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아 가면서, 인간이 교류하는데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던 시간과 공간적 제약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에 큰 역할을 했다.

1958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유럽과 미국을 연결하는 메인 루트인 북대서양항로에서 항공운송이 해상운송량을 뛰어넘었다.

가장 눈부신 발전은, 피스톤식 프로펠러기와 터보프롭기에 이어 탄생한 제트기의 등장이다. 영국이 개발한 최초의 민간용 제트기인 코멧1기는 항속거리나 탑재력이 당시로서는 피스톤기만도 못하여, 속도는 1.5배 이상의 고속이었지만 경제성이 없었다. 게다가 사고까지 연속되어 형식승인이 취소되고 생산이 중단되었다.

이 제트기를 경제적이고 고성능의 대형수송기로 발전시킨 것은 미국이었다. 1954년 7월 보잉사가 B707제트기가 첫 비행을 하고 이듬해인 1955년 10월에는 팬암이 B707 20대와 DC8제트기 25대를 발주하자, 세계의 항공사들은 아연 긴장하기까지 했다. 제트기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한 것이다. B707은 프로펠러기에 비하여 탑재력과 속도면에서 각각 2배 이상으로 향상되어 전체 수송효율은 4배가 향상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선보인 미국 더글러스사의 DC8기도 비슷한 성능이었다.

이것은 드디어 항공사가 충분히 채산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수송력이 증가함으로써 단위 운항원가가 저하되고 항공운임이 상대적으로 낮아져 항공의 대중화가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 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항공사들도 점점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김백순 | ‘월간 항공’ 1991. 1. ~ 12. 연재분 요약 | 필자 게재]

태그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