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조인(鳥人)들

<한국미래학회 발행 ‘한국인의 하늘과 꿈-한국의 鳥人들’ 집필 요약-1997년>

‘ 꿈’은 욕망의 또다른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가진 자는 그것을 목표로 삼아 자신의 의지를 더하여 마침내 성취하게 된다. 인류 문명은 바로 이 ‘의지 있는 인간들의 꿈’에서 발전한 것이라 해도 지나침은 없으리라.

<‘하늘을 날겠다는 꿈’의 역사>

하늘을 날고 싶어했던 인류의 꿈은, 아마 비상하는 새의 날개짓을 바라보며 그 무한한 자유와 후련함을 느꼈을 까마득한 옛날부터 시작되었음에 틀림없다. 불교 미술의 보고인 中國 敦煌의 莫高窟 벽화 중에는, 이미 6세기쯤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하늘을 나는 飛天 그림이 있다.

날개를 달아 보겠다는 꿈을 실제로 시도했던 최초의 기록은 10세기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양의 어떤 수도사가 몸에 인공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탑에서 뛰어내리다 두 다리가 부러져 불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16세기를 전후하여 레오날도 다 빈치가 그려 놓은 유품 중에도 오늘날의 헬리콥터, 글라이더, 낙하산, 날개 달린 비행기 모양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러 분야에 걸쳐 재주가 많았던 다 빈치의 상상력의 폭이 대단했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불과했었다.

이것이 실제로 실현된 분명한 기록은 18세기에 이르러서다. 1783년 11월 프랑스에서 ‘몽골피에’ 형제가 제작한 熱氣具를 타고 ‘드 로제’와 ‘달랑드’후작이 파리 상공을 90미터 상승하여, 8 킬로미터나 날았던 것이다.

불분명한 점이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보다 200년쯤이 앞선 1590년대에 하늘을 날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일보 ‘李圭泰코너’; 1985.8.23.).

조선시대 申景濬이라는 실학자의 ‘策車制’란 문헌에, 임진왜란 당시 晋州城이 왜군에 포위 당했을 때, 성주의 친지 한 삶이 飛車를 하늘에 띄워 성안 사람을 30리 밖으로 피란시키고 성밖에서 양식을 실어다 성안에 대었다는 전설이 인용되어 있다.

또한 조선 철종 시대인 1810년대에 저술된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의 ‘五洲衍文 長箋散稿’에는 원주(原州)에 사는 한 선비가 소장한 책을 인용해 비차의 원리를 소개하고 있다. 4인승으로 규모가 컸으며, 생김새는 따오기(鵠)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두드려서 이 안에 들어 있는 바람을 일으켜 떠오르게 하는 원리라고 했다.

기록에 따르면 魯城에 사는 尹達圭씨가 비차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었는데 전승시키지 않고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달리 전해지는 말로는 비차를 만든 사람이 전라도 김제 사람인 鄭九平씨라고 하는데, 같은 사람인지 아니면 두 사람이 각각 별도의 비차를 만든 것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그후 조선 고종 시대에는 학우선(鶴羽船)이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쇄국 정책을 펴던 대원군이 서양 세력에 대비할 신식 군사 장비가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전국에다 방을 붙이고 아이디어를 현상 공모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 응모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선체를 가벼운 학털로 만들고 매미의 아랫배처럼 주름잡힌 고복(鼓腹)을 만들어 그 신축으로 바람을 일으켜 떠서 날기도 하고 다시 물에 떠가기도 하는 공수양용(空水兩用)이었다.

실제로 이 비행선을 만드느라 팔도의 학이 멸종하다시피 했지만 실험단계에서 쓸모 없음이 입증되어 실용화되지는 못했는데, 그후 대원군이 실각하는 등 비운이 잇달자 학 귀신이 붙어서 그렇게 됐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상공에 비행기 출현>

기체에 발동기를 달아 동력을 이용하여 하늘을 난다는 착상으로 이를 성공시킨 것은 미국의 라이트 형제로 20세기의 일이다.

1903년 12월 14일부터 시작된 실험에서 12마력의 가솔린 엔진을 단 ‘플라이어’기가 처음엔 3초, 2차 때엔 12초 동안을 날다가 4차 실험에서는 약 1분간 260미터나 날아 엔진을 단 ‘비행기’의 성공을 이룬 것이다.

이 실험은 세계 각국에 큰 영향을 미쳐 항공기 개발에 열기를 띄게 했으며,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군용 및 상업항공의 발전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상공에서의 최초 비행은 1913년 일본 해군의 기술 장교인 ‘나라하라’ 중위에 의해서였다.

일본의 기계 문명에 대한 공개적인 시위가 당시의 용산 연병장에서 있은 것이었다. 이후에도 일본인 다까소오, 오자끼 등과 미국인 아트 스미드 등이 방문하여 비행 시범을 벌여 한국에서도 누구나 비행기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1917년 5월에 여의도에서 열린 미국인 조종사 ‘아트 스미드’의 곡예 비행에는 약 5만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하는데, 당시 서울의 인구가 20만명 정도였으니 시민의 4분의 1이 모인 대기록을 세운 것이었다.

<‘安昌男’이 등장하기까지>

이러한 행사들이 일제의 암흑 시대에서도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의 창공에 대한 꿈을 자극하였음은 분명했다.

항공 기술을 익히려는 웅지를 품은 젊은이 중에 安昌男도 있었다. 20세기가 시작된 1900년도에 출생한 安昌男은, 서울 휘문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처음엔 자동차 학교에 입학하여 2개월 동안 운전 교육을 받고 난 뒤, 1920년 가을에 도오꾜에 있는 오구리 비행학교의 6개월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듬해인 1921년 4월 일본 정부는 비행사의 자격을 법률로 규정하였는데, 이에 따른 첫 시험이 5월에 실시되었다. 安昌男은 모두 17명이 응시한 이 첫 면허 시험에서 합격자 두명 중 수석으로 합격하여 비행학교 조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1922년 11월 일본 비행협회가 주최한 도오꾜-오사까 간을 왕복하는 우편 비행대회에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 대회에서 安昌男이 조종한 비행기는 150마력 엔진에 시속 80마일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고장이 잦아 일본 육군비행학교 창고 속에 내버려두었던 것이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조종한 비행기는 동력 270마력에 시속 140마일 수준에 비하면 상당히 뒤떨어진 것이었다. 그것도 고장이 잦아 창고에 넣어두었던 비행기를 빌어 당당히 최우수상을 받았으니 安昌男의 비행기술이 얼마나 우수했는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흔히 安昌男이 한국인 최초의 조종사로 알려져 있으나, 여기에는 약간의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이미 1917년부터 일본 군마현에 있는 비행기 제작소 연습부에 金景圭가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비행사 면허를 취득하거나 다른 뚜렷한 활약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우리 항공 역사에서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또한 미국에서 레드우드 항공학교를 졸업한 韓長鎬, 李用善, 李 超, 吳林夏, 李用根, 張炳根 등 6명이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라고 하는 설도 있다.

<재미 동포들의 朝鮮飛行隊>

1919년의 3.1 독립운동 등, 이무렵 국내외 상황에 자극을 받은 미국의 동포들 사이에서도 조국 광복을 위해서 공헌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당시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군무총장(지금의 국방장관)에 선임되어 상해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盧伯麟은 자금을 담당하던 郭林大 등과 함께 1920년 1월에 미국 캘리포니아의 북쪽 윌로스에 사관 양성을 위한 군단을 조직했다.

그곳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상당한 재력을 쌓아놓고 있던 金宗林의 지원으로 연습용 비행기 3대를 2천 달러씩에 사들이고 미국인 비행사를 고용하여 농장 한 쪽에 활주로를 닦아 놓기도 했었다. 이 비행기에는 태극 마크와 함께 ‘조선항공대’를 의미하는 ‘KAC’라는 표지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李用根, 李用善, 李超를 비롯, 韓龍南, 金泰善, 洪鍾萬, 朴熙昇, 鄭夢龍, 張炳勳, 朴大一, 金加謙, 趙鍾翊, 朴永燮, 金自重 (1명 미상) 등 15명의 애국 청년들이 뛰어들어 “동경으로 날아가 쑥대밭을 만들자”는 열기가 가득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 서부지역에 몰아닥친 풍수해로 인하여 자금을 대던 金宗林을 비롯한 동포들의 농작물이 큰 피해를 받아, 보유기 3대를 매각하고 1921년말에 해체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그후 朴熙昇과 李用根은 미국인이 경영하는 비행학교로 옮겨 1922년 5월에 국제비행사 면장을 취득했고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는 이 두사람을 포상하고 육군 비행 참위(소위)에 임관시켰다. 金自重은 만주로 건너가 중국 군벌 張作霖의 휘하로 들어가 활동을 벌이다 사고로 숨졌다고 한다.

<임시정부의 독립 투쟁과 비행사들>

이렇게 국내외에서 비행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도 비행기를 군사와 선전에 이용할 것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계획을 실제로 주도했던 분이 바로 島山 安昌浩 선생이었다. 島山선생이 1920년 1월에 기록한 일기를 보면, 비행기와 조종사를 구하는 문제에 대해 미국인들과 접촉한 내용들이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전단 살포 등 국내에 대한 선전 활동용이 주요 목표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결과적으로 이 계획은 재정난 등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임시정부 요인들은, 그 대신 중국 군벌 휘하에 있는 여러 비행학교에 우리 젊은이들을 추천하여 비행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중국에는 南苑, 保定, 廣東, 雲南 등 4개의 항공학교가 있었다. 중국의 여러 군벌들이 각기 항공학교를 설립, 공군력을 증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으로 망명한 우리 청년들은 유력 인사의 추천만 있으면 항공학교에 입교할 수 있었다. 많은 학자금을 들여 일본으로 유학 간 비행사들에 비해 중국 항공학교에 들어간 한국 청년들은 학자금 없이 비행술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독립 투쟁에 가담하는 뜻을 갖고 임시정부 요인들의 추천을 받아 이들 비행학교에 들어가 비행술을 배웠다. 徐曰甫를 비롯한 崔用德, 朴泰河, 金震一, 李英茂, 張志日, 金殷濟 등이 그분들이다.

徐曰甫는 島山 安昌浩 선생이 설립한 평양 대성학교 출신이다.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에서 활약하다가 북경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투신했다.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본격적인 독립 투쟁의 기회가 있으리라 판단하고 南苑항공학교에 입교하여 1921년 11월에 졸업했다. 비행사가 된 후에도 중국군에 몸을 담았었는데, 1928년 5월에 비행중 추락하여 일생을 마쳤다.

徐曰甫와 함께 독립운동 단체 ‘신의단’을 조직하기도 했던 崔用德은, 權基玉, 金震一, 장성철 등과 함께 중국 국민혁명군 항공대 창설 멤버로 활동하여, 교관, 수상비행대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우리 광복군이 창설되자 참모처장, 사령관 등을 맡다가, 해방후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도 기여, 2대 공군참모 총장을 역임했다.

아무튼 중국 무관학교나 비행학교를 통해서 많은 수의 장교들이 배출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 임시정부의 역할이 컸으며, 뒷날 광복군의 주요 멤버로 활약하기도 했다.

<일제시 우리 비행사들의 모국 방문 비행>

미국, 일본, 중국 등지에서 우리 한국인 비행사들이 배출되면서, 국내에서는 동아일보사가 “조선인도 노력하면 될 것이라는 실질적 교훈 (1922년 11월 22일자 사설)”으로 삼고 이 뜻을 깨우치기 위한 목적으로 安昌男 모국 방문비행을 추진하였다.

1922년 12월 5일 밤, 安昌男이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경부선 열차로 남대문역 (현재의 서울역)에 내리자 소문을 듣고 찾아온 시민들이 엄청난 인파를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 하얀 명주 목도리를 두른 택시 운전기사가 뭇 여성들과 청소년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시절이었으니, 비행사에 대한 호기심 또한 대단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조선일보 12월 7일자에서는 “…수만의 군중들은 씩씩한 장부의 기상을 나타내는 안 군을 보고 ‘安昌男 만세’를 불렀다…..”고 그 날의 광경을 보도했다.

분해해서 선편으로 실어온 영국제 ‘뉴포르’ 단발기는 일본의 오구리 비행학교에서 빌린 것이었는데, 安昌男은 이를 ‘금강호’라 명명하고 동체에 한반도 지도를 그려 놓았다. 기체 조립을 끝낸 다음날인 12월 8일에는 예비 시험 비행을 했고 마침내 12월 10일 5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 상공에서 역사적인 비행대회를 가졌다.

安昌男은 여의도 간이 비행장을 이륙, 남산을 돌아 창덕궁 상공으로 날아가 조선 왕조 마지막 황제인 순종에게 경의를 표하고는 서울을 일주했다.

첫 비행 후에도 그는 몇 차례 더 시범 비행을 하며 재주넘기, 橫轉, 스피닝, 롤링 등의 고등 비행의 묘기를 보여 관중들을 열광케 했다. 또한 동아일보와 후원회의 공동 명의로 “….문명의 진운(進運), 이기(利器)의 발달에 낙오해서는 망하며, 과학 발달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의 전단을 공중에서 살포하기도 했다.

공식적인 기록으로 일본에서 비행사 면허를 가장 먼저 획득하고 고국의 상공을 가장 먼저 비행한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安昌男에 대한 ‘한국 최초의 鳥人’이라는 월계관은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행사가 있은 뒤 서울에서는 “떴다 보아라 安昌男”이라는 속요가 유행하게 되었고 1930년대 초까지도 이 노래는 전국에서 불려졌다고 한다.

두 번째로 모국 방문 비행을 한 것은 李基演인데, 安昌男보다 1년 뒤인 1923년 12월 19일 서울에서 비행회를 가졌다.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의 대대적인 선전도 주효했겠지만 李基演도 安昌男 이상의 관중을 동원했고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1924년 2월 11일 상오와 하오 두차례 경기도 포천 방문 비행을 했다. 또한 1925년 4월 30일에는 전국 일주 비행을 계획, 대전, 전주 등 전국의 주요 도시를 비행했다.

李基演은 그 뒤 1926년에 ‘경성항공사업사’를 창설했으나, 이듬해인 1927년 9월 10일 경북 점촌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여 이렇다 할 업적은 남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 한국 땅에 최초로 항공사업을 일으켰다는 의의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李基演이 두 번째 비행회를 가진 4일 뒤인 1924년 2월 15일, 전남 장흥 출신의 李商泰도 광주와 목포에서 비행회를 가졌다.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安昌男에 이어 1922년 3월에 두 번째로 비행사 자격을 받은 장덕창은, 오사카에 세워진 일본항공수송연구소(JAL의 전신)에 창립 멤버로 입사하여 여객 수송 비행사가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후배들 보다 늦게 모국방문 비행회를 가졌다.

1925년 6월 12일 일본 아사히 신문사 후원으로 張德昌은 경남 통영을 출발하여 목포와 서해를 거쳐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여의도에서 다시 이륙하여 서울 상공을 날며 시민들에게 묘기를 선사한 뒤에 오후에 또 한차례 아사히 신문 서울 지국 기자를 동승시키고 다시 여의도를 이륙했으나, 갑자기 한강대교 부근의 둔치에 추락했다.

기체는 산산조각이 났으나 張德昌은 무사했고, 아사히신문 서울 지국 기자는 중상을 입었다.

이 사고는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기 사고 기록이 되었다.

1920년대에 일본에서 비행사가 되어 모국으로 날아와 비행 행사를 벌인 것은, 금의환향했다는 영웅심도 작용한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에 항공사상 나아가서는 근대과학을 접하고 각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중국에서 활동한 우리 비행사들>

또한 일본에 건너가 역경을 딛고 비행사가 된 한국 청년들 중에는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을 하기도 했다. 1924년에 安昌男도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독립운동 진영에는 공군력이 없어 비행사로서 독립 운동에 기여할 길이 없었다.

安昌男은 부득이 孫文이 주도하던 남방 혁명군의 郭松齡 揮下로 들어갔는데, 우수한 조종력을 인정받아 군사 교육도 받지 않은 채, 이내 중장으로 승진했다. 그후 중국 내부 상황이 바뀌면서, 呂運亨의 소개로 閻錫山 휘하로 옮겨 항공사령관과 비행학교 교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다 1930년 4월 8일 산서성 태원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31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일본에서 비행술을 익히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 공군에서 활약한 분들로는 安昌男 외에도, 權泰用, 閔成基, 鄭雨燮, 田相國 등이 있다.

<여류 비행사의 탄생>

독립운동에 가담코자 중국으로 건너간 젊은이 중에서 여류 비행사도 탄생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는 權基玉인데, 숭의여학교에 다니던 중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6개월 동안의 옥고를 치른 뒤, 이듬해 9월 상해로 탈출하여 항주에 있는 홍도여학교를 졸업하고 임시 정부 이시영 선생의 추천으로 운남항공학교에 입학하여 李英茂, 張志日 등 한국 청년들과 함께 비행술을 익히게 되었다.

1925년에 비행학교를 졸업한 權基玉은 중국 국민혁명군에 소령으로 입대하여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공군으로 활동을 하다 광복을 맞았다.

權基玉이 중국에 머물고 있던 중, 그녀를 추적하던 일본 경찰이 살인 청부업자까지 보냈는데, 權基玉은 오히려 동료들과 함께 킬러를 권총으로 사살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여장부였다.

두 번째의 여류 비행사는 일본에서 비행술을 익힌 李貞喜다.

1908년 서울 종로 출생인 李貞喜는 숙명여학교를 5학년에 중퇴하고 17세 처녀의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동경의 가바따 비행학교에 입교는 했으나, 학비 조달이 어려워 부득이 학업을 중단할 지경이었는데, 나고야 비행학교 출신인 徐雄成의 도움으로 나고야 비행학교로 옮겨 1926년 11월에 3등 비행사 면허를 획득했다.

어렵게 소망을 이룬 李貞喜는 1928년 3월에, 대구 토목건축조합 주최로 대구 연병장에서 모험비행(곡예비행)대회를 가졌다.

이 대회의 기금 마련을 위해 李貞喜의 모교인 숙명학교에서는 서울 소공동의 공회당(구 상공회의소 건물)에서 음악회를 열기도 했었다.

李貞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여 1949년 2월 공군 여자항공교육대를 창설, 공군 대위로 임관되어 교육대장으로서 金璟梧(전 대한항공협회 회장), 鄭淑子 등 15명의 여자 항공사관생도를 양성했다. 李貞喜는 6.25 동란 중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李貞喜에 이어 대구 출신의 朴敬元도 1926년 일본 비행 학교에 입교하여 이듬해 1월 3등 비행사 자격을 획득했다.

朴敬元은 1933년 8월 8일 도오꾜를 이륙, 대한 해협을 가로질러 대구까지 날아오는 모국 방문 장거리 비행에 나섰다가, 하꼬네산 허리에 충돌하여 기체와 함께 최후를 마쳤다.

<愼鏞頊의 조선비행학교>

安昌男 보다 한 해 아래인 1901년 전북 고창에서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난 愼鏞頊은 서울 휘문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安昌男이 다니던 오구리(小栗) 비행학교에 들어갔다. 졸업 후에 愼鏞頊은 2등 비행사 자격을 취득한 뒤, 곧바로 도오아(東亞) 비행전문학교에 진학하여 1925년에 1등 비행사 자격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당시 愼鏞頊은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의 재력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항공술을 익힌 셈이었다. 귀국 전에 그는 앞에서 언급한 李基演, 李商泰 등과 함께 ‘조선 비행가 협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1927년 12월 그는 자신의 두 번째 모국 방문 비행을 마치고 비행사 양성 교육기관을 세우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이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총독부 당국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哲宗의 부마인 朴泳孝를 조선비행학교 설립 추진위원장으로, 宋鎭禹 동아일보사장과 金炳魯 변호사 등을 위원으로 추대했다. 아울러 1928년 말에 사재 5천원을 들여 여의도에 조선비행학교 교사를 준공하고 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

愼鏞頊은 이어서 미국에 비행기 1대를 주문했는데, 1930년 4월에 비행기가 도착하여 그 해 5월 15일 정식으로 개교했다. 비행학교는 수업연한 1년 6개월, 학비 800원 (연습비 포함)이었다고 한다.

유일하게 알려진 졸업생으로 이한설이 있는데, 비행술을 배운 후 중국으로 마명했다는 사실만 확인되고 있다.

비행학교 운영과 함께 愼鏞頊은 일본 나까지마(中島) 비행기 제작소에서 만든 4인승 쌍엽기를 도입하여 1930년 9월부터 유람비행도 실시했다. 서울 상공을 일주하거나 인천까지의 왕복 비행이 고작이었지만 한국에서의 한국인에 의한 유료비행은 이것이 처음이다.

(한국 땅에서의 최초 유료 비행은 1916년 10월 박람회 형식의 ‘조선 물산 공진회’ 기간중, 일본인 조종사 오자키에 의해 실시됐다.)

이 무렵 쌀 한가마가 13원이었는데, 탑승요금은 서울 상공 일주에 5원, 인천 왕복이 10원이었다고 하니 퍽 비싼 요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승객들에게 ‘사망하더라도 이의없다’는 요지의 각서를 받고 탑승시켰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러한 사업을 위해 ‘愼항공사업사’를 세웠다가 1936년 10월에 ‘조선항공사업사’로 개칭했다. 비행학교 설립 이래 이러한 과정에서 고향의 3천석지기 논밭을 판 돈이 모두 들어갔다는 얘기도 있다. (최연홍, ‘신용욱 비행사의 생애–날개가 있는 것은 추락한다’, 월간중앙 1992년 2월호)

이 회사에서는 서울-이리 (전북 익산) 항공노선을 개설하고 얼마후에는 이 노선을 광주까지 연장하기도 했다. 아울러 동해안에서 어군탐지 활동도 하였으며, 우편물 수송도 했다고 한다.

또한 서울 영등포에 글라이더 제작소를 설치하여 꽤 수익도 올렸다고 하는데, 한 때는 종업원이 3백명에 달하는 큰 규모였다.

(글라이더는 1930년대 중반에 주로 일본인 학생들에 의해서 스포츠적인 개념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1940년 미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전운이 감돌자 한국 내의 모든 중학교에서 글라이더 훈련이 공군 인력 수급 목적으로 의무화되었다.

실제로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훈련된 학생들은 소위 소년항공병으로 징집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 愼鏞頊은 일본 해군으로부터 항공기제작소 설립 요구를 받아 부산 부전동에 20만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공장을 지었다. 일본 해군과 50%씩 출자해서 1944년 2월에 ‘조선항공공업(주)’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愼鏞頊이 사장에 취임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 해군이 운영했다고 하는데, 해군 비행기 3대를 제작한 뒤 해방을 맞아 적산으로 몰수되었다.

또한 1941년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비행기의 징발과 함께 비행사들도 직간접으로 일본군에 협력이 불가피했고 愼鏞頊 자신도 일본 해군 영관급 대우를 받으며, 본의 아닌 협조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해방후 愼鏞頊씨가 친일파로 몰려, 반민특위에 의해 6개월간의 감옥 생활을 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글라이더 활공 신기록 세운 김광한>

愼鏞頊과 함께 일하던 항공인 중에 김광한이라는 분도 있는데, 일본 체류 시절에 활공 신기록을 세운 기록도 갖고 있다.

1925년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일본에 건너가 인쇄공, 신문 배달 일을 하던 중, 주변의 도움으로 일본 항공수송연구소에 들어가 정비일을 하면서 틈틈이 비행술을 익혔다.

당시의 비행기들은 프로펠러를 손으로 돌려 엔진을 점화시켰는데, 힘이 센 그가 비행학교에서 이런 일을 해주는 대가로 비행 연습을 하다가 나중에는 학비 면제를 받는 학생 겸 정비사로 근무하면서 비행사 면허증을 취득했다고 한다.

그후 비행소년단 지도교관을 맡기도 한 그는, 1941년 1월에 글라이더의 활공 비행 신기록에 도전하여 체공시간 11시간 40분을 기록했다. 그 때까지 일본이 세운 10시간 33분의 기록을 갱신한 것이다.

그 해 5월에 귀국한 그는 愼鏞頊이 운영하던 비행학교의 교관과 조선항공사업사 비행사로 근무하다가, 해방후 공군에 입대하여 전투조종사로 활약했다.

<金永修의 조선항공연구소>

고학을 하느라 나고야비행학교를 뒤늦게 졸업한 金永修는 일본에서 훈련받은 비행사로서는 가장 늦은, 1939년 4월 7일에 모국방문 비행을 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대구 동촌비행장에 조선항공연구소를 세웠다.

항공연구소를 개설했지만, 당시 그에게는 모국방문비행을 위해 일본 육군에서 불하받은 비행기 1대 밖에 없었다.

그러나 金永修는 방공의식 고취, 곡산 장려, 신사 참배 운동 등을 벌이던 총독부의 계획을 역이용, 대구를 비롯한 전국의 큰 도시에서 1944년도까지 열심히 순회 비행 대회를 가졌다. 매 대회에서 받은 사례금으로 비행기 구입비를 충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39년 중고기 1대로 출발했던 조선항공연구소는 2년도 안돼 보유기를 5대로 늘렸다. 이같은 발전 속도로 보면 큰 규모의 비행학교로 성장할 수도 있었으나, 愼鏞頊과의 주도권 쟁탈에서 고배를 마셔 1944년 10월에 문을 닫게 되었다.

또한 일본 조선군사령부는 이 무렵 화신백화점의 朴興植사장에게 조선비행기공업(주)를 설립케 하여, 경기도 안양에 공장을 건설하기까지 했으나, 시험 제작만 했을 뿐, 완제품 한 대도 생산하지 못하고 해방을 맞았다.

<해방직후 한국의 민항공>

1945년 8월, 해방 직후 일제 치하에서 비행사의 꿈을 이루었던 분들 30여명을 중심으로 해방 다음날부터 바로 ‘조선항공대’가 발족되었다.

張德昌, 徐雄成, 尹昌鉉, 金石桓, 여류비행사 李貞喜 등이 그 주축이었다.

이들은 민항공 내지는 공군 창설에 힘을 보태기 위한 일차 목표로 일본군이 보유하던 시설을 접수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한낱 공상에 그치고 말았다. 게다가 미 군정 당국의 특별포고로 우리나라에서는 미군기를 제외한 어떤 항공기의 비행도 전적으로 금지되었다.

그해 9월에 조선항공대는 그 명칭이 군국주의 냄새가 나는 사설 군사단체 같다 하여 발전적으로 해체케 되어 ‘조선항공협회’로 발족되었다.

그후 일제 말기 조선비행연구소를 운영하던 金永修와 함께 비행학교 교관으로 있던 金永煥, 李根晳씨가 대구비행장에서 미군의 승인없이 수송기를 타고 비행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일본군이 보유하고 있던 기재를 조선항공협회 측에서 인수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전국의 모든 비행기가 분해되어 식기 재료로 민간업자에게 불하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뒤이어서 이 협회도 미 군정 당국의 사설 군사단체 해산 명령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항공 단체의 명맥은 이듬해 봄에 설립된 ‘중앙활공연구소’, ‘조선항공기술동맹’, ‘서북항공대’, ‘대한학생항공연맹’ 등, 군소 항공단체들의 난립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중 1946년 5월말에 중국 공군에서 활약하던 崔用德, 權基玉 등이 귀국하고 이들을 위한 환영모임이 개최되면서 항공단체의 통합 논의도 본격화되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8월 YMCA회관에서 2백여명의 항공인들이 모여 ‘한국항공건설협회’ 회칙을 통과시키는 한편, 회장 崔用德, 부회장 李英茂 등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미 군정 당국의 비협조와 당시 정치적 상황 등으로 자금이 소요되는 사업계획은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오히려 ‘대한학생항공연맹 (이사장 尹昌鉉, 회장 安東赫, 학생대표 李元馥)’의 경우 6.25 동란으로 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5년 동안, 종합 항공훈련, 모형항공기 대회, 학생 항공의 날 기념 행사 등을 해마다 여는 등, 기성 항공단체들도 해내기 어려운 행사를 개최하여 항공사상 보급에 큰 공헌을 했다. 또한 뒷날 우리 공군이나 민항에서 활약한 수많은 항공인들을 배출해내기도 했다.

‘ 중앙활공연구소’ 설립자이자 ‘한국항공건설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한 金石桓은 영어나 일어로 된 항공용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으로 이 분야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愼鏞頊의 대한국민항공사(KNA) 설립>

이런 와중에서도 우리 민항공사 설립 움직임이 여러 갈래로 추진되었다.

安昌男씨 다음으로 비행사 자격을 취득했던 張德昌씨와 역시 비행사 자격과 재력을 갖추고 있던 尹昌鉉씨 두사람이 ‘고려항공(주)’ 설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들 보다 한발 앞서 미군정청으로부터 면허를 취득한 것은 愼鏞頊씨였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대립도 표출되었는데, 고려항공 지지측에서는 愼鏞頊의 일제 치하의 행적을 규탄하여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張德昌씨는 공군의 모체가 된 조선경비대 육군항공대에 입대하고 愼鏞頊씨의 조선항공사업사 재건은 1946년 3월 1일 대한국제항공사 설립으로 구체화되었다. 愼鏞頊씨는 막후에서 지원해주던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정치비서 윤치영씨를 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상무가 됐다.

그날 각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렸다.

“…..우리 조선항공은 한국 유일의 민항공기관으로….. 금번 군정청으로부터 정기항공에 관한 정식 인가가 부여되었는 바…..미제 비행기를 수입하여 조종이 익숙하게 될 때까지 미국인 정조종사와 한국인 부조종사로 조종할 터이다…..”

그러나 이 회사는 아무런 사업도 하지 못한 채로 지나다가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된 후, 같은 해 10월 대한국민항공사(KNA ; Korean National Airlines)로 재설립되어 愼鏞頊씨가 스스로 사장직에 취임하였다.

영업은 사장이 직접 뛰고 총무3명, 조종 2명, 정비 10명의 규모였다. 발족 1개월 뒤에는 인원을 배로 늘리고 미국에서 스틴슨 경비행기(조종사 포함 5인승) 3대를 도입, 교통부로부터 서울-부산, 서울-강릉, 서울-광주-제주, 서울-옹진간의 면허를 받아 10월 30일 서울-부산 구간에 취항하였다. 이것은 정부수립후 최초의 우리 민간항공기 취항이 되는 것이며 ‘항공의 날’도 이 날짜를 택한 것이나, 조종사는 미국인이었다.

당시 1회 운항에 4명의 승객밖에 태울 수 없었는데도 그마저 확보하기가 어려워 항공기는 하늘에 떠있는 시간보다 땅에서 쉬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이것은 외국인 조종사 고용과 함께 적자를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당시 월급 700달러의 미국인 조종사가 아니라도 3분의 1정도의 봉급으로 고용할 만한 한국인 조종사도 많았지만 안전성에 대한 신뢰를 받기 위해 이들을 채용했다고 한다.

6.25 동란을 거치면서도 그런 대로 운영을 해오던 愼鏞頊사장은, 1958년 2월 16일, 부산에서 서울로 가던 KNA ‘창랑호’의 납북 사건으로 커다란 곤경에 처하게 됐다. 게다가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정치인으로서도 활약하던 愼鏞頊씨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가뜩이나 어렵던 KNA는 경영난이 더욱 가중되어 도산 위기에까지 처했다.

(당시 愼鏞頊사장의 KNA가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 중의 하나는 ‘우남호’였는데 이것은 李承晩 대통령의 호에서 따온 것이고 ‘창랑호’는 張澤相씨의 호에서 비롯된 것이니, 자유당 정권과의 관계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趙重勳의 한국항공 설립>

1960년대 초, 서울-동경(東京)간에는 미국(美國)의 노스웨스트 항공사(NW)와 대만(臺灣)의 중국민항공사(中國民航公司,CPA)만 취항(就航)하고 있어서, 한국은 월간 30만 불에 달하는 막대한 외화를 유출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었다.

국제선 취항이 가능했던 곳으로 오사카, 홍콩, 타이페이 등이 있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운항 중단이나 휴항이 되풀이되어 초라하기 그지없는 형색이었다.

이럴 무렵 당시 韓進商事를 운영하던 趙重勳사장은, 항공사업을 관심있게 주시하고 있었다. 장차 국제선에 취항하여 성공하면, 기업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고 국가적으로도 귀중한 외화를 절약할 수 있으리는 게 그의 구상이었다.

趙重勳은 우선 국내선 전세기부터 시작해볼 요량으로 당시 許政 과도내각 교통부에 일단 한진상사 명의로 항공운송 사업면허를 신청하고 4인승 세스나기 1대를 미국에 발주했다.

이와 동시에 기존 업체인 KNA와의 과당 경쟁을 피하기 위해서 제3자를 통하여합작을 제의하였으나,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KNA가 재정적으로 궁핍하여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웠던지, 교통부에서는 8월초 한진상사에 부정기 항공운송 사업면허를 쉽게 내주었다.

한진상사가 미국에 주문했던 세스나기도 계획했던 대로 들어와 8월 15일을 기하여 에어 택시 영업이 개시되었다. 말하자면 비행기 전세사업이었던 셈이다.

에어 택시는 시작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 趙重勳은 그해 11월에 ‘주식회사 韓國航空’을 별도 법인으로 설립했다.

곧 이어 이듬해 2월에는 40인승 쌍발기인 콘베어-240기를 1대 추가로 도입하여 서울-부산(釜山)간 본격적인 영업에 나섰다.

그러나 국내선에만 취항할 수밖에 없던 한국항공은 KNA와의 경합이 가열됨에 따라 점차로 공급 과잉 상황을 초래하였다. 이에 따라 양사의 좌석이용률이 감소하는 등 적자가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애초 호기심에서 콘베어기를 이용하던 승객들이 점차 줄어들어 운항횟수를 감축해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런 중에 5.16을 맞았고 정치적 격변기에서 사회 전체의 경기가 크게 침체되어 가뜩이나 적은 승객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더구나 당시 항공유에 고율의 세금까지 부과되어 채산성도 없었다.

KNA의 愼鏞頊사장은 혁명정부에 부정축재자로 몰려 구속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 나와서, 10여일 뒤에는 여의도 샛강에서 자결로서 일생을 마감했다.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였던 安昌男씨의 뒤를 이은 원로 비행사의 한사람으로, 일제하에서부터 우리나라 항공발전에 헌신해왔지만, 정치와 사업의 실패로 애석하게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것이다.

혁명정부는 KNA에 감독관을 파견하고 정부 보유 외화 중에서 상당 금액을 KNA에 융자하기로 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결정했다.

이런 주변 환경에서 趙重勳은 결국 항공사의 운영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보유 항공기 2대를 매각하고 한국항공의 문을 닫았다.

혁명후 사회 분위기의 침체와 KNA를 지원하기로 결정한 혁명정부의 방침에 맞서기가 어려웠던 이유도 하나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국영 대한항공공사의 흥망>

그후 1962년에 정부는 국영 大韓航空公社를 설립하였다. KNA가 정부 지원에도 불구하고 도산 지경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영세한 민간 자본으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항공사업 운영은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이 航空公社도 다시 민간에 불하하게 되었다. 국가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민간 자본도 크게 성장하였다는 판단도 있었지만, 그보다 직접적인 동기는 경영상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이 접촉한 재계 인사들은 대부분 한국 민항공의 장래를 비관하여 선뜻 나서지 않았다. KNA나 航空公社의 어려움을 너무 잘 알고 있는 터였기 때문이었다.

민영화 문제를 놓고 정부가 고심하고 있는 이 시기에 趙重勳은 월남에 진출해 있는 인력수송을 위해 120인승 중형 비행기 ‘슈퍼 컨스틀레이션’ 4발기 한 대를 사들였다.

航空公社가 누적되는 적자 경영을 개선하기 위하여 주2회 운항하던 서울-타이베이-홍콩노선을 휴항하고 있어, 서울과 월남을 오가는 자체 인력의 이동에도 불편이 컸기 때문이었다.

항공공사에 대해 골치를 앓고 있던 정부에서는, 차라리 韓進에서 공사를 인수하라고 제안하게 되었다.

당시 航空公社는 동남아 11개국 항공사 가운데서 열한번째 가는 항공사였다. 보유하고 있는 비행기가 8대라고는 하지만 전체 좌석수를 합해도 오늘날 점보기 한 대에 해당하는 400석도 채 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누적된 적자에 더하여, 짊어지고 있는 국내외 금융채무만 해도 자그마치 27억여원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니 이를 맡아 보겠다고 나설 사람이 없었다.

1968년 여름 趙重勳은 청와대의 초청을 받았다.

朴正熙대통령은 趙重勳과 단 둘이 남아 독대하게 되자 어려운 부탁이 있다고 하며 꼭 들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趙重勳 ‘내가 걸어온 길’).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 별도의 전용기는 그만 두고라도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 나들이를 한번 하고 싶은 게 소망”이라는 얘기와 함께, “越南에서 휴가를 나오는 우리 장병들이 외국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장병들의 사기도 문제려니와 귀중한 외화가 낭비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趙重勳이 묵묵부답으로 있자 朴대통령은,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 1번지이며,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에는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것이 아니냐”며 航空公社를 맡아 줄 것을 거듭 강조했다는 것이다.

趙重勳은 당시를 회고하며, “大韓航空公社 인수 문제는 사업상의 손익 계산을 떠나야 가능한, 기업가로서의 소명의식과 국익에 대한 봉사라는 신념이 필요한 사안이었다”고 그의 회고록에서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중역진들의 반대는 퍽 완강했다고 하는데, 趙重勳은 “돈을 벌자고 시작했다가 밑지는 사업도 있고, 밑지면서도 해야 하는 사업이 있는 것”이라며, 航空公社의 인수는 국익과 공익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일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국영 大韓航空公社의 민영화가 결정되었다. 납입 자본금 15억원을 액면가대로 계산하여 5년 거치 10년 상환으로 하고, 航空公社의 누적 적자를 포함한 부채 등, 27억여원을 그대로 떠맡는 조건이었다.

<民航 – ‘(株)大韓航空’의 출범>

趙重勳이 항공공사를 인수할 당시, 사업 전망은 몹시 불투명했다. 극동의 협소한 분단국이라는 지정학적인 약점으로 항로상의 제한을 감수해야 했다. 보유 항공기의 노후와 기술인력의 태부족으로 인한 국제경쟁력의 취약성도 큰 문제였다.

군 조종사 출신이라도 민항기 조종사로서의 임무를 제대로 다하려면 수년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또한 회사 경영상의 문제점 외에도 정책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들까지 겹쳐 있었다.

보유 항공기는 좌석수 30 ~ 40석 규모의 쌍발 프로펠러기가 여섯 대, 72석 규모의 4발 프로펠러기가 한 대였으며, 모두 여덟 대의 보유기 중에 그나마 유일한 제트기인 DC-9 도 고장을 일으켜 대수리를 받아야 했다.

大韓航空이 살아남는 길은 짧은 시일 내에 최대 수송체제를 갖추는 것이라고 판단한 趙重勳은 우선 국내선용으로 적합한 YS-11기 도입을 서둘러 2년만에 8대를 도입하였다.

민항 초기 그나마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 국제노선은 서울-도쿄, 오사카 노선과 부산-후쿠오카 노선에 불과하였다.

국제선의 경우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개발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趙重勳은 1단계 조치로 항공공사가 운항을 중단했던 서울-홍콩 노선을 재취항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69년 10월에는 서울-오사카-타이베이-홍콩-사이공-방콕을 연결하는 동남아 최장노선을 개설하였다.

그후 趙重勳은 세계 민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속도로 대한항공을 키워 나갔다.

1970년대 초의 미주노선을 개설에 앞서, 한미항공협정 개정 노력을 기울이는 등,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사업이자 곧 우리의 항공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결국 大韓航空이 민영화된 지 2년만인 1971년 4월 서울-도쿄-로스앤젤레스를 잇는 태평양횡단노선에 우선 정기적으로 화물기를 취항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누구나 당연히 나있는 ‘길’이라 생각하지만, 당시에 도쿄를 경유하는 以遠權 확보는 우리 항공노선망 구성에 있어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새 길을 닦는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태극 마크를 빛내며 ‘우리의 날개’가 마침내 호놀룰루와 LA에 첫 착륙을 하던 날, 우리 동포들은 열광적인 환영을 했다. 일제 치하에서 정든 고향을 떠나 만리 타국에서 한 맺힌 가슴을 안고 살아온 동포들에게는, 조국의 국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실감이었고 조국이 보다 가까이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계기였던 것이다.

우리 국기가 새겨진 국적항공기란 특히 해외의 동포들에게 바로 그렇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大韓航空은 1973년 10월 6일 우리 민항사상 최초로 서울-파리를 잇는 북극항로에 취항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중동, 아프리카, 대양주, 중국, 남미 등으로 취항지를 확대, 우리 민항은 물론 국민의 활동 범위를 넓혀 현재는 세계 33개국 88개 도시에 취항하는데 이르렀다.

교통의 연결과 지역의 발전은 대단히 밀접한 관계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인데, ‘날기’를 꿈꾸던 우리 선구자들의 의지가 결국 한국이 세계 10대 항공국의 하나로 발돋움케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김백순 | 한국미래학회 발행 ‘한국인의 하늘과 꿈-한국의 鳥人들’ 집필 요약-1997년 | 필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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