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 창업자 조중훈(趙重勳)

한진그룹 창업자 조중훈(趙重勳)
열흘간 진행된 말레이시아 아남 툽텐 린포체 명상프로그램

<월간조선 발간 ‘기업인 열전’>

“하늘에도, 땅에도, 바다에도 큰 길이 있다”

수송사업의 외길

정석(靜石) 조중훈(趙重勳;1920~2002) 회장은 광복 직후 한진상사(韓進商事)를 창립하고 수송사업에만 전념하며 평생을 보내다가 지난 2002년 11월에 타계한 국제 수송물류업계의 큰 별이다.

수년 전 정석이 ‘내가 걸어온 길’이란 제목으로 자서전을 펴냈을 때 남덕우(南悳祐) 전 국무총리는 발간에 부치는 글을 통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조회장은 오로지 수송 사업의 외길을 걸어왔다. 육운, 해운, 항공 부문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한진그룹의 이러한 고도의 전문성은, 다만 한진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수송 기능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생각된다. 한진해운과 대한항공이 세계 수송망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확보하면서, 그를 통하여 한국의 통상(通商) 확대에 이바지하는 한편, 세계에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재벌의 이른바 문어발식 경영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한진만은 예외이고 그런 점에서 한진의 기업집단은 전문화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지난 날의 경제정책 담당자로서 나는 이 점을 무척 고맙게 생각해왔다. 오로지 자신의 창의와 능력으로 이러한 전문 기업집단을 발전시켜온 그의 기업과 정신가 경륜은 타의 모범이 될 것이다.”

해방과 함께 한진상사 창립

3.1 독립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 태어난 정석 조중훈이 한진상사를 창업한 것은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1일이었다. 해방 전 일제의 기업정비령에 의해, 보링 공장을 정리할 때 받은 돈과 저축해둔 것을 합쳐 자본금 1만 원(圓)의 합자회사 ‘한진상사’의 간판을 내걸었다. 인천시 해안동 30평 남짓한 콘크리트 2층 건물이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스물 다섯 살. 인천은 중국의 국제항인 상해와 서울을 연결하는 가장 가까운 거리의 항구로, 일제가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은 공업지구 중의 하나였다. 일제 말기부터 사업가로서의 꿈을 키워 온 청년 조중훈이 항도 인천을 택한 것도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이었다.

인천을 사업의 터전으로 삼아 대중국 무역 사업을 벌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 군정 하에서 무역 허가에는 많은 규제가 따랐고, 이른바 배경이 없으면 허가를 받아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렇게 기대가 어긋나자 정석은 운수업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일본에서 조선 기술을 익히고 해방 전 보링공장까지 운영한 경험이 있던 터라 기계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기초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항을 통해 드나드는 많은 화물들이 소비자의 손에 전달되려면 또 하나의 수송 과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정석의 판단은 적중하였다. 무역항 인천과 수도 서울 사이의 물류가 빈번해짐에 따라 경인간 화물 운송 수요는 꾸준히 이어졌다. 그는 현장을 돌며 수송 작업을 진두에서 지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경영자인 정석 자신이 기계 장비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결정적인 강점으로 작용하였다. 운수업에서 차량을 고장 없이 유지 관리하고 고객과의 시간 약속을 지키는 것은 사업의 생명이라고 할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진상사는 다른 업체들에 비해 높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한진상사는 성장을 거듭하여 미 군정청으로부터 경기도 지역의 화물운송사업 면허를 취득하여 본격적인 운송 사업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창업 4년 뒤인 1949년 무렵 한진상사는 화물 차량 15대와 업무용 지프차 2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운전원, 하역 인부, 점원 및 사무원 등 종업원이 40여 명에 이르렀다.

한진상사가 짧은 기간에 이처럼 사업 기반을 굳힐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정석의 사업에 대한 집념과 정확한 판단력 그리고 ‘신용과 성실’의 사업관에 힘입은 것이었다.

사업 초창기 한 직원에게 부채를 상환하는 심부름을 시켰는데, 직원의 실수로 하루가 늦어지게 되었다. 며칠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정석은 곧바로 채권자를 찾아가 정중히 사과하고 문제의 직원을 엄중히 문책한 일화에서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평소 신용 바탕으로 잿더미 위에서 재기

1950년에 30세가 된 정석이 사업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본격적인 발돋움을 시작할 무렵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차량과 장비들은 대부분 군용으로 징발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나머지 장비들도 전쟁통에 온전하게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움켜쥐고 있겠다는 것은 허망한 욕심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정석은 예금을 몽땅 찾아서 직원들을 모아 공개적으로 분배하면서 후일을 기약했다. 창고문도 열어 직원들이 필요로 하는 장비는 모두 나누어주고 겨우 남아있는 트럭 한 대로 가족들과 함께 피난 길에 오를 수 있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피난길에 올라 고난의 세월을 보낸 정석은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진 1953년 5월 부산에서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피난 생활을 끝내고 다시 찾은 사업의 터전은 폐허였다. 회사 건물과 자동차 정비 기계 등 회사의 모든 재산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정석은 폐허 위에 천막으로 가건물을 세우고 다시 한진상사의 간판을 달았다.

그 무렵 인천항에는 막대한 양의 미군 군수 물자가 반입되어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운반되고 있었다.

정석은 주위로부터 사업 자금을 변통하여 강원도, 경기도 등지를 주요 사업 지역으로 삼아 다시 소규모 화물 수송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운전기사들과 함께 창고 안에서 기거하며 사업의 재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이 이루어졌고 8월 15일에는 행정부가, 9월 16일에는 국회가 환도하였다. 전쟁 발발과 함께 징발되었던 운전 기사들이 한 사람씩 돌아오자, 정석은 그때마다 자금 압박을 무릅쓰고 트럭을 한 대씩 늘려 나갔다.

가장 큰 애로는 사업 자금을 융통하는 일이었지만 전쟁 전에 쌓아둔 신용을 인정받아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었으며, 과거의 고객들도 그를 기꺼이 도와주었다.

1954년 2월에는 전국의 운수업자들이 화물차·버스·택시 3개 업종의 단일 연합회로 전국 자동차운송사업 조합을 결성했는데, 정석은 여기서 경기 지역 대표로 선출되었다.

피난지에서 인천으로 다시 돌아온 지 2~3년만에 한진상사는 전쟁 직전의 사세를 만회할 수 있었다. 짧은 기간에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신용’에 더하여 정석의 사업에 대한 집념과 강인한 투지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인천 일대에서 꾸준하게 가꿔온 ‘신용’이라는 씨앗이 전후 복구 물자 수송이라는 열매를 맺기 시작함으로써 한진의 본격적인 성장을 이룬 것이었다.

당당한 자세로 인간적 교류

남들이 창안한 사업을 모방하기 보다는 남보다 한 발 앞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창출해야 한다는 사업관을 갖고 있던 정석은 미군 용역 군납 사업에 착수했다. 당시 물품 군납에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비해 용역 군납에는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드물었다.

한진상사는 1956년 10월 미군을 상대로 군수물자 수송용역에 관한 교섭을 진행했는데, 이때 정석은 미군 책임자에게 당시로는 획기적인 책임제 수송계약을 제의하였다. 수송 도중에 발생하는 일체의 사고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한진상사가 변상한다는 조건부 수송 계약이었다. 한진상사가 당시 수송업체로는 유일하게 자체 정비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 계약 성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새 사업 개척에 성공한 정석은 미군 용역 사업이 외국을 상대로 하는 사업인 점을 고려하여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사업에 임하자고 다짐하였다. 또한 동업자들과의 관계에도 세심한 배려를 하여 소모적인 과당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한진상사의 차량을 6대에서 4대로 줄이는 대신 경기 지역 수송업자들의 차량을 고루 사용하는 용차(傭車) 방식을 활용하여 서로 이익을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정석은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신용을 얻는 데 전력을 다했다.

한 번은 어떤 트럭 회사에서 임차한 차량의 운전사가 수송을 맡은 미군 겨울 파카 1천 300벌을 아예 차떼기로 남대문 시장에 내다 판 사고가 일어났다. 어찌된 일인지 그 운전사는 미군들로부터 물건을 인도했다는 서명까지 받아왔다. 그러니 서류상으로만 본다면 굳이 변상을 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 아니라 신용이라고 생각한 정석은 직원 한 명을 남대문시장에 상주시켜 잃어버린 물건이 나도는지 살펴보도록 했다. 공개적으로 떠들썩하게 수사를 하게 되면 물건이 숨어버릴 것을 염려한 그의 지혜였다. 과연 예상대로 5일쯤 지나자 분실된 물건이 시장에 나돌기 시작하였다. 정석은 그 분실물을 전량 구입하여 미군에 변상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한진상사가 벌어들인 돈의 절반에 가까운 1만 달러라는 거액의 손실을 가져오기는 했으나, 그 대신에 미국인들에게서 확고한 신용을 얻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석의 문제 해결 능력과 신용을 지키려는 열의를 지켜본 미군들은 그후 한진상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신용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쌓은 한진상사의 미군 용역 사업은 그만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정석은 미군 용역 사업을 하면서 계약 당사자로서의 당당함을 잃지 않았고 이와 함께 인간적인 교분도 두텁게 쌓아갔다. 이 무렵에 사귀었던 많은 미국인 친구들은 귀국하여 국방성 등에서 근무하면서 후일 한진의 월남 용역사업 참여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경쟁사 방해로 비포장로에 물뿌리며 버스 운행도

미군의 용역 사업을 수행해가면서 합자회사로서는 발전의 한계를 느낀 정석은 장래를 내다보고 1957년 1월 회사 체제를 주식회사로 개편하여 상호를 ‘한진상사 주식회사’로 변경하였다..

이 시기에 한진상사가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한 것은 현대적인 운송 회사로서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차량의 효율적인 운용과 신속한 수송을 위해 여러 도시에 사무실과 차고를 임차하여 영업소를 개설하는 등 지속적으로 영업망을 확대하고, 서울 을지로 입구에 있던 반도호텔 일부를 임차하여 본사 사무실로 사용했다.

당시 우리 나라 경제가 1번지로 알려진 반도호텔에 입주한 것은 한진상사의 본격적인 재계 진출을 의미했으며, 정석의 이름이 재계에 거명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정석은 1961년 6월 한진관광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1963년 12월 국내 최초로 서울과 인천간 버스여객자동차운송사업 면허를 취득하였다. 당시 경인간의 교통량은 전국 최고의 수준으로, 출퇴근 시간에는 극심한 혼잡이 빚어졌다. 이에 인천상공회의소에서는 1963년 1월 교통부에 경인간 버스를 증차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동인천-서소문 간의 운행을 시작한 한진특급 버스는 에어컨을 장착한 한국 최초의 좌석버스로 짐짝 버스와 만원 열차에 시달리던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좌석버스의 출현으로 수입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기존 업자들의 강력한 반발로 한진특급버스는 번듯한 신도로를 두고 김포 사거리에서 뒷길을 따라 동인천으로 가는 구도로를 이용해야만 했다. 구도로는 비포장이라 비가 오면 길이 움푹 패이곤 했다.

정석은 역시 개척자였다. 노선 개설 이후 3개월 동안 운행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회사 비용으로 인력과 장비를 동원하여 길을 닦고 먼지가 나지 않도록 물차를 동원하여 물을 뿌려가면서 운행하도록 했다.

한참 두인 196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 구간이 개통되자 한진은 특급버스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고속버스 사업에도 선두 주자로 진출하였는데, 당시 한진고속은 고속버스의 대명사로 통용되었다.

민간차원의 외교에 큰 보람

한진상사가 운수업을 중심으로 착실히 발전해가던 1960년대 초는 4.19혁명과 군사혁명 등 정치사회적으로 격동의 전환기였다. 이런 어수선한 시절에 경제활동이 원할할 리 없었다.

외환보유액은 1961년 말의 2억불에서 ’63년 말에는 1억 3천만 불로 감소되어 있었고, 국가 경제가 전반적으로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 무렵 정석은 당시 경제기획원 장관을 겸하고 있던 장기영(張基榮) 부총리로부터 심각한 외환 위기극복에 필요한 2천만 불을 일본에서 변통하는데 힘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우리나라 가용외화가 4천 700만 불에 불과하던 시절의 2천만 불은 큰 금액이었다.

정부가 정석을 지목한 데에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그가 일본이나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 장성(將星)들을 통해서 알게 된 일본 기업인과 그 친구들이 일본 정계와 관계에 적지 않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석은 그 동안의 경과 등을 파악하고 몇 가지 협의를 한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교류가 있었던 대장상 다나카 대신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얼마 전에 있었던 니이가타(新潟) 지진 당시, 우리 적십자사를 통해 전달한 쌀가마 등 구호품이 성의가 없고 빈약하여 오히려 불쾌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것과, 또한 우리 어선들의 일본 영해 침범과 나포에 대한 수습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에 관한 것이었다. 정석은 이러한 내용을 즉각 주일(駐日)대사관을 통해 장 부총리에게 보고하도록 하여 무마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이러한 대화는 이미 쌓아놓은 친분을 바탕으로 한 민간 차원에서나 나올 수 있는 얘기였기에, 정석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결국 친분이 있던 당시 다나카 대장상을 만나는 등 정석의 집요한 설득 끝에 2천만 불에 달하는 협력기금차관이 성사되었다.

정석은 이 때 정부만이 아니라 민간차원에서의 뒷받침도 훌륭한 외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으며, 이러한 깨달음은 그 후에까지 하나의 사명처럼 각인되었다.

또한 정석은 일본 방문을 통해 국내에서는 미처 접할 수 없었던 월남전 양상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을 얻는 계기도 되었다. 장기영 부총리도 그에게 월남에 관심을 갖도록 권유하여 실제로 2년 뒤에는 월남 진출의 막이 열리게 되었다.

월남에서도 현지인들과 우호 다져

정석이 월남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월남전이 시작되기 전인 1957년 말 동남아를 둘러보는 기회에 월남에 들렀을 때였다. 이때부터 월남 정세의 변화를 예리하게 관찰해 온 정석은 1965년 월남전이 확대 일로를 걷기 시작하자, 전략 물자의 신속 정확한 수송을 필요로 하는 월남에는 운수업을 주업으로 하는 한진상사에 적합한 사업 기회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월남 진출을 결심하게 되었다.

정석은 워싱턴에 날아가 국방성 고위 장성들과 접촉, 월남에 한국 기업이 참여해야 할 당위성을 주장하고, 한진상사의 사업 계획에 협조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국방성 고위 장성들 중에는 한국 근무 시절에 교분을 쌓은 수송 분야 출신들이 많았다. 그들은 정석의 능력과 신용을 잘 알고 있던 터라 계약 체결에 협조해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월남 진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조언도 들려주었다.

1965년 12월에는 정석이 이사장으로 있던 한국용역군납조합(韓國用役軍納組合) 시찰단이 월남 군납 현황을 시찰하기 위해 월남을 방문하였다.

월남 현지에 체류하는 20여 일 동안 정석은 군수 물자가 체화 현상을 빚고 있는 월남의 항구를 둘러보고 정석은 국내에서 쌓은 경험과 기술이라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정석은 퀴논을 월남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로 결심하고 한월(韓越) 경제각료회의가 열린 ’66년 1월부터 미 국방성을 상대로 계약 체결을 위한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한진상사에 대한 미 국방성의 신용 조사를 마치고, 마침내 한진상사가 단독으로 ‘초청받는 형식'(invited contract)의 수의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1966년 5월 26일 퀴논항에 도착한 정석은 월남전이 3년 이내에 끝난다는 가정 아래 초기부터 현장에서 작업을 진두 지휘하였다. 한진상사에 맡겨진 첫 작업은 퀴논항에 반입된 군수품을 하역, 인근의 수송대대 기지창까지 수송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인력과 장비의 도착이 늦어져 상황이 다급해짐에 따라 월남지사는 회사 간부까지 포함한 10명의 인원이 매달려 천 470톤에 달하는 군수품의 하역을 32시간 만에 끝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미군들은 그만한 작업 분량이면 이전에는 1주일이 걸렸을 것이라고 말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첫 작업의 성공적인 수행은 한진상사가 미군의 신임을 얻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진상사는 월남에서의 사업뿐만 아니라 현지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월남에서 안전 및 교통 사고 처리를 위해 언어가 통하는 월남인을 고용하는 한편, 우리나라 직원들을 위한 자체 김치 공장에 월남 여성들을 취업시키고 현지 작업에 다수의 월남 노무자를 채용했으며, 월남인의 현지 취업이 증가하자 취업 규칙을 제정하여 노무 관리에 공정을 기했다. 이밖에도 월남인과의 우호 증진 및 대민 사업의 일환으로 1969년 작업장 내에 기술학교를 세워 월남인들에게 무료로 여러 가지 기술 교육을 제공하는 한편 난민 구제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월남에서의 적극적인 대민 사업으로 인해 한진상사의 직원들은 전쟁 기간 동안 퀴논 일대의 월남 주민들과 미군들로부터 ‘한진맨 넘버원’이라는 호평을 듣게 되었으며, 월남에서 반미 데모가 일어났을 때도 한진상사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해외 사업, 더구나 전쟁터에서의 사업은 현지 국민들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국가간의 외교적인 문제까지 고려하는 세심한 경영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정석이 어느 기업가보다 깊이 인식하고 미리 대처한 덕분이었다. 한국 기업의 해외진출의 역사가 일천(日淺)했던 당시에 이미 국제적 기업가로서의 감각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 하겠다.

‘노력 없는 대가는 없는 것’

사업의 잇단 성공으로 굳건한 재정적 기반을 확보하게 된 정석은 수송과 연관이 있거나 이를 보조할 수 있는 계열회사를 신설 또는 인수함으로써 종합 수송 그룹으로서의 면모도 갖추어가기 시작하였다.

1967년 7월 자본금 2억 원으로 대진해운(大進海運) 주식회사를 설립한데 이어, 삼성물산으로부터 동양화재해상보험(東洋火災海上保險) 주식회사를 인수하였다. ’68년 2월에는 한국공항(韓國空港)을 설립하였고, 8월에는 자체 수요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건설 회사인 한일개발(韓逸開發)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서울역 건너편에 한일빌딩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1969년 3월에는 대한항공공사(大韓航空公社)를 인수하여 본격적으로 항공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진의 사세(社勢) 확장과 함께 정석의 이름도 여기저기 알려지기 시작하자 빠른 시일 내에 부를 축적했다는 이유만으로 ‘운이 좋았다’거나 ‘정치적인 배경이 있었던 것 아니냐?’ 등의 구설이 따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이 다 그의 피나는 노력에 대한 대가라고 말한다.

그는 하루 6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고, 독서나 여행도 사업과 관계가 없는 것은 별로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기업의 발전에 온 정력을 쏟았다.

그 스스로도 ‘사업에 성공하려면 운이 따라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지만, 이것이 노력도 없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거라면 전혀 맞지 않는 말’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70년에 발간된 재계인사평론(財界人士評論)에서는 정석을 “실업으로 국위를 선양한 조국 근대화의 상징적 경제인”이라 평가하면서 “이 나라 경제계를 주름잡고 있는 한진상사는 국내 기업은 물론 해외에 인력수출의 붐을 타고 우리 기술진을 월남에 진출시켜 막대한 외화를 벌어 들이고 있는 시대적 조류를 값있게 순화하여 정부 경제시책과 자립경제 확립에도 크게 공헌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소명의식’으로 대한항공 민영화

정석은 우리나라 민간항공 발전사의 주역이었다. 지리멸렬하던 우리 민항을 오늘날 세계 10위권으로 끌어올린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정석은 30년 이상을 우리 민항 발전에 몸 바쳐 왔다. 수시로 변하는 연료 비용, 외국항공사들과의 엄청난 국제 경쟁, 국적항공사로서의 책임 때문에 정책적으로 운항을 포기할 수 없는 적자노선 유지, 높은 고정비 등을 감안하면 투자에 비해 이윤이 보잘 것 없는 외줄타기 사업이지만, 그는 미래에 대한 투자를 계속해 왔다.

1969년 3월에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여 민영화시킨 것 자체를 정석은 하나의 ‘소명의식(召命意識)’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당시 항공공사의 보유 항공기는 제트기 한 대와 프로펠러기 7대뿐이었다. 반면 인력은 770명이란 방대한 규모를 유지하여 적자가 누적되고 있었다. 취항률이 23%에 불과하였고 결항률도 세계 항공 사상 유례없는 17%를 기록하였다.

당시 항공공사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던 정부는 한진에서 항공공사를 인수하여 운영을 맡으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정석이 이미 1960년도에 한국항공을 설립하여 항공사 경영에 경험이 있다는 점과 그 동안의 사업 과정, 특히 월남에서의 수송사업을 통해 알려진 추진력과 애국적인 열정이 감안된 제안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석 역시 빚더미에 올라앉은 ‘항공공사’를 선뜻 인수할 마음은 나지 않았다. ‘항공공사’의 누적 적자는 차치하고라도 짊어지고 있는 국내외 장단기 금융 채무만 해도 자그만치 27억여 원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니 사업을 한다는 사람 치고 바보가 아닌 이상 맡겠다고 나설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무렵 세 차례에 걸친 정부 당국자의 ‘항공공사’ 인수 요청을 사절한 정석에게 청와대로부터 초청이 왔다. 항공공사 민영화 문제에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단 둘만의 자리를 만든 후 정석에게 어려운 부탁이 있다고 하며 나라의 체면을 위해 꼭 들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대통령 재임 기간중에 별도의 전용기는 그만 두고라도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 나들이를 한번 하고 싶은 게 소망”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월남에서 휴가를 나오는 우리 장병들이 외국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장병들의 사기도 문제려니와 귀중한 외화가 낭비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마침내 본론에 들어가 그에게 ‘항공공사’를 맡아 운영해 달라고 하였다.

정석이 묵묵부답으로 있자 박 대통령은,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 1번지이며,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에는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것이 아니냐”며 인수를 재삼 요청하였다.

한 나라의 원수(元首)인 대통령이 국가의 체면까지 거론하며 그렇게까지 요청하는 데는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어, 결국 그 자리에서 그는 “항공공사 인수를 회사 간부들과 의논해서 수임사항(受任事項)으로 알고 맡겠다”고 약속하고 말았다.

‘대한항공공사’ 인수가 당시로서는 사업상의 손익 계산을 떠나야 가능한, 기업가로서의 소명의식과 국익을 위한 봉사라는 신념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정석은 이렇게 작정을 한 뒤 스스로도 “민항공을 고차적인 국가 사업으로 발전시켜야 할 시대적 요청과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해 경제 각 분야가 균형 있게 발전해야 한다”는 소신을 마음 속으로 다지고, 완강하게 반대하는 중역들을 설득시켜 갔다.

가망 없는 항공사 인수를 왜 하느냐는 중역들에게 정석은, ‘돈을 벌자고 시작했다가 밑지는 사업도 있고, 밑지면서도 계속해야 하는 사업이 있는 것’이라며, 항공공사의 인수는 국익과 공익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하나의 소명임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우리 한진상사가 월남에서 번 돈은 국익을 위해 재투자되어야 하며, 육해공 삼위일체를 이룬 수송 기업의 구축은 나의 이상’이라고 고집하였다.

그는 “후진국에서의 항공산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더구나 빚투성이 항공공사를 인수한다는 것은 내 일생일대의 성패를 가늠하는 일대 모험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렇다고 건너야 할 강인데도 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빠져 죽을지 모른다고 해서 건너지 않는다면 선 자리에서 그냥 죽고 말 것이다. 결과만 예측하고 사업을 시작한다든가, 이익만을 생각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업은 진정한 의미의 사업일 수 없다. 만인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해서 만 가지 어려움과 싸워나가면서 그 사업을 키우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기업가로서의 진정한 보람이 아니겠는가. 국적항공기는 우리 영토의 1번지다. 우리 국적기가 나는 곳에 우리 국력이 뻗치는 것이다.”라며 중역들을 설득했다.

우리나라 민항 발전의 주역

항공공사에는 그 동안 인사원칙을 무시하고 인맥에 의해 채용된 직원들이 반수 이상이나 되었고, 심지어는 출근부에 도장만 찍고 가는 유령 직원까지 있었다. 이런 실정이라 인수 실무 책임자는 부적격자를 선별하여 교체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정석은 “항공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공기가 아니라 거기에 종사하는 종업원이므로 어떤 경로를 통하여 채용되었든 간에 이미 항공사 업무에 대해서 최소한의 훈련이나마 쌓은 사람들의 경력은 그대로 인정하여 한 사람의 이탈자도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쫓겨나면 본인의 망신이려니와 가족이 어려워지니,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면 자리를 바꿔 주거나 교육을 시키면 된다”는 뜻이었다. 그의 이런 지시에 간부들도 놀라고 오히려 더욱 충성심을 보였다.

이것은 20여 년 사업을 이끌어 오면서 ‘기업은 인간이 만들고 그 사람들로 구성되는 조직의 힘에 의해 육성, 발전되는 것’이라는 그 나름의 체험과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기업은 곧 인간’이며 인화(人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그의 생각의 발로였다.

이와 함께 공사 시절에 직원들이 받던 낮은 급료를 자연스럽게 보완하고 사기 앙양과 함께 짧은 기간 내에 영업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고자 당시로서는 새로운 개념이었던 인센티브제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매일 일정한 수 이상의 승객을 수송하게 되면 그 실적 여하에 따라 성과급을 추가로 지급하는 방안이었다.

이 무렵 세계의 선진 항공사들은 대형 제트기로 수송 체제를 갖추고 치열한 ‘하늘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새롭게 출범해야 하는 대한항공의 면모는 너무도 보잘 것 없었다.

당시 ‘항공공사’는 동남아 11개 국 항공사 가운데서 열 한 번째 가는 항공사였다. 보유하고 있는 비행기가 8대라고는 하지만 전체 좌석수를 합해도 오늘날 점보기 한 대에 해당하는 400석도 채 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FC-27기 2대는 임차, DC-3기 2대는 1934년에 제작돼 수명을 다한 것이고, 1946년에 제작된 DC-4기는 하늘에 떠 있는 시간보다 땅 위에 주저앉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나마 DC-9 쌍발 제트기 한 대만이 쓸만한 것이었다.

정석은 보유기종의 제트화 장기계획을 세우고 이를 적극 추진해 나갔다.

또한 1971년 1월에는 김포공항 격납고를 준공하였다. B747 1대와 F-27 4대를 동시에 수용하여 정비할 수 있는 이 격납고의 건립으로 대한항공은 제트 시대에 대비한 만반의 채비를 갖추게 되었다.

아울러 국내 노선을 대폭 확장, 증편하여 전국적인 순환 노선망을 형성하고 전국을 1시간대 생활권에 묶음으로써 국민에게 항공 교통의 편의를 제공하기로 하고 1969년 7월 20일 서울-포항 노선을 신설한 것을 시작으로 차례로 국내선을 신설하였다.

이에 따라 국내선은 2년 뒤인 1971년 말 무렵에는 15개 도시, 17개 노선을 매일 49회 이상 왕복 운항하는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전국의 주요 도시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순환 노선망을 형성하게 되었다.

재미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

우여곡절을 겪으며 1971년 개정된 한미항공협정으로 태평양횡단노선 개설이라는 한국 민항공의 숙원이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정석은 우선 서울-도쿄-로스앤젤레스를 잇는 태평양 횡단노선에 정기 화물기를 취항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정작 취항은 가능해졌지만 문제는 영업이었다. 항공화물 운송업에 종사해 본 전문가도 없었고 막상 실어 나를 화물조차 확보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정석은 곰곰히 생각한 끝에 당시 대미 수출품의 대부분이 가발류임에 착안하여 가발 수출업체를 찾아 나서라고 직원들에게 지시하였다. 느닷없이 가발 비상이 걸린 실무자들은 오직 사명감 하나로 외국인 바이어들을 찾아 나서고 일부는 가발업체를 찾아 뛰어 다녔다.

가발업체 대부분이 중소 규모로 도처에 산재해 있어서 그 소재를 파악하는 것부터가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소재 파악을 위해 복덕방까지 들려가며 어렵사리 알아낸 수출업체에 접근하더라도, 일부 업체를 제외하고는 우리 항공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외국항공사를 선호하는 하주들에게 같은 값이면 우리 나라 비행기로 수출해 달라는 설득전을 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대한항공에 짐을 위탁하는 하주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가능한 도쿄 이원권 확보에 주력, 평소부터 정석과 가깝게 지내던 일본의 재계와 정계 인사들의 도움으로 당국자들을 설득하여 힘겹게 이를 따낼 수 있었다.

태평양 횡단 여객편 취항은 우리 민항사상 초유의 일로서 광복 27년, 그리고 민항공 창업 이후의 숙원이 이루어지는 벅찬 순간이었다. 국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실감(實感)이었고 나아가 동포들에게는 조국이 보다 가까이 있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계기였던 것이다. 태극 마크를 빛내며 첫 착륙을 한 ‘우리의 날개’ 그 장한 모습을 보러 나온 수많은 동포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해주던 기억을 정석은 생전에 감동으로 되뇌이곤 했다. 우리 국기를 단 국적항공사란 해외 동포들에게 바로 그렇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업이었다.

창업자이자 항공전문가로서의 정석

정석은 한번 마음 먹으면 끝까지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다 기계를 좋아하여, 어려서도 신기한 것을 보면 만지고 뜯으며 이치를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의 선친도 그의 이런 성격을 고려하여 ‘동(動)과 정(靜)’이 조화를 이루라는 뜻에서 아호를 ‘정석(靜石)’이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런 활동적인 성격으로 정석은 대한항공 인수 초기 거의 정비 현장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매일 새벽 4시에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대로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몰고 김포공항을 찾아가 밤새 읽고 공부한 항공기 제트엔진 관련 지식을 현장에서 확인하곤 하였다. 그러나 현장 여기저기 직원들을 세워놓고 간섭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혹시 철야 작업 중에 잠이 든 정비사를 보아도 야단치거나 깨우지 않고 틈틈이 작업장 바닥에 나뒹구는 나사못을 주워 작업대 위에 올려놓기도 하였다. 얼마 뒤에 그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비사는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탄식을 했다고 한다.

이런 한편으로 겨울에 추운 곳에서 철야 작업을 하는 정비사들이 감기가 들까 안스러워 방한복을 추가 지급하는 등 무엇보다 현장 직원들의 애로 사항을 어루만지려 많은 애를 썼다.

이러한 그의 노력과 배려는 직원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변변치 못한 장비와 시설에도 불구하고 작업 능률이 급속히 향상되어 갔다.

평소 그의 독서 습관은 일정한 분야에 편중하기보다는 그 때 그 때 관심이 가는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것이었지만 대한항공 인수 후에는 항공 관련 서적을 집중적으로 사들여 탐독하기 시작했다. 제트엔진에 관한 기능이나 성능 같은 실무적인 서적에서부터 유체역학, 재료학 원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책을 접했다. 한번은 그가 CF6엔진의 소리가 이상하다고 점검을 지시했더니 실제로 베아링이 정상이 아님을 확인한 적도 있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정석은 항공기 엔진 소리를 들으면, 어느 타입인지를 구분하고 이상 유무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또한 항공 연료나 용접, 재질 등에 관해서는 실무 기술진과 깊숙한 얘기도 나눌 정도가 되었다. “회장이 언제 이런 것까지 공부했느냐”고 깜짝 놀라거나, ‘항공 기술자’라는 찬사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상황에 대한 냉철하고 정확한 판단

1970년대에 접어들어 국제항공업계의 추세는 대형기에 의한 대량수송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태평양 노선 조기 개설을 최대 기업목표의 하나로 설정했던 대한항공도 태평양 노선을 위시하여 세계 주요 노선에서 주력 기종으로 부상되고 있는 B747 도입을 추진했다.

민영화 일년만에 선진 항공사만이 운영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던 B747기를 도입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모험이고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신생 대한항공이 당시 최첨단의 대형 점보기 도입을 결정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정석이 허세를 부린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당시 점보기 두 대를 도입하는 데는 7천만 불 상당의 거금이 필요했다. 이만한 돈이면 세계 최대 규모의 화학비료공장을 세우고도 남을 정도였으니, 아닌게 아니라 그런 말들이 나올 법도 했다.

정석은 주변 사람들의 반신반의 속에서도 차분히 도입을 추진하여 ’72년 드디어 정식으로 구매 계약을 체결하고 이듬해 5월에 1번기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매스컴들은 “대한항공의의 역사적 도약”이라고 평가하였다. 그 역시 다시 한번 새롭게 각오를 다지고 신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항공의 로고를 단 B747 점보 1번기는 1973년 5월 16일 미주 노선 운항에 첫 투입되었다. 이 때 점보기 취항 기념식에서 정석은 ‘보잉 747 점보기의 취항은 번영된 내일을 향한 국민들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1980년대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우리 기업의 사명을 고취시켜 준 계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처음 점보기 도입 결정을 내릴 때까지 소요자금, 기술, 수요 확보 등의 문제로 사내에서도 반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정석에게는 ‘기업인은 상황에 대한 냉철하고 정확한 판단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미래에 대한 비젼과 정확한 예측을 근거로 하여 타이밍에 맞도록 적절한 결정’을 내려야지만 기업의 번영을 도모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어떤 의미에서 창업주로서의 본능이나 육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시 점보기 도입은 당장에는 어려움도 많았지만, 후일 대한항공의 성장사(成長史)에 큰 획을 그은 것임은 틀림 없었다.

이어서 1974년 9월 대한항공이 세계 최초로 태평양 상에 점보 화물기를 투입하여 서울-LA 노선에 취항시킨 일은 국제 항공업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일대사건이었다.

당시 어느 모로 보나 대한항공보다 선진 업체였던 일본항공은 대한항공의 선제 취항 소식을 듣고 고위 중역 한 사람이 정석을 찾아와 회사의 체면을 위한 것이라며 대한항공의 점보 화물기 취항을 한 달만 늦춰 달라는 부탁을 해왔을 만큼 이것은 업체의 자존심이 걸린 큰 ‘사건’이었다.

항공기 도입과 한불 민간외교

1970년대는 정석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로 우리나라 민항의 비약적인 발전을 위해 모든 정열을 쏟아부은 때였다. 숙원사업이던 미주노선 취항을 이룬 정석은 유럽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유럽 지역에는 다수 국가의 여러 항공사가 밀집해 있는데다가 그들끼리의 긴밀한한 기업제휴와 자국기 이용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시장에 극동의 신생 항공사가 진출하여 노선을 개설하고 새로운 기반을 개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한항공이 이렇게 까다로운 유럽에 단독 취항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 부담이 큰 일이었다. 따라서 정석은 그동안 유대관계를 돈독히 해온 에어 프랑스를 동반자로 삼아 일단은 공동운영 방식을 채택키로 상무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에어 프랑스와 접촉하면서 파리 취항을 추진하고 있던 중, ’73년에 정석이 한불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되고부터 급진전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정부 고위인사로부터 생각지도 않았던 요청을 받게 되었다. 에어버스 항공기 6대를 구매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에어버스는 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영국, 독일, 스페인 등 유럽 4개국에서 이제 막 공동으로 개발하여 놓은 상태였다.

신기종을 운용하는 데에는 새로운 전문인력과 장비 등에 수반되는 엄청난 예산과 시간이 요구되고, 더욱이 에어버스의 성능이나 장단점을 모르기 때문에 정석은 선뜻 구매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정부가 굳이 에어버스를 구매해 주도록 그에게 요청한 것은 외교적인 필요에 의해서였다. 당시 우리 정부로서는 여러가지로 프랑스 정부와 관계를 개선해야 할 사정이 있었다.

당시 냉전시대에, 더우기 분단국의 입장에서 국제 사회에서 북한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아프리카 신생국을 비롯한 제 3세력의 지지가 필요했고, 따라서 이들에 대한 영향력이 큰 프랑스와의 관계를 돈독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로서는 이런 국가외교상의 어려운 상황을 안 이상 정부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국익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니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여러 차례에 걸친 기술적 검토 후에 에어버스 구매를 결정하였다.

대한항공의 에어버스 구매 결정은 다른 항공사들에도 구매 의욕을 촉진시켜 항공기 제작사에 큰 도움을 주는 결과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한불간 유대강화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이런 후에 대한항공은 ’73년 10월 6일 한국 민항사상 최초로 서울-파리를 잇는 북극항로에 취항하게 되었다. 미주에 이어 드디어 유럽 시장 개척에 성공한 것이다.

구주노선 개설로 대한항공은 세계 일주 노선망 구축에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유럽의 심장부인 파리와 한국을 직접 연결하여 수출증대 및 문화교류 등에 일조함으로써 국력신장과 국위선양, 나아가 국민적 자부심을 충족시키는 데도 큰 기여를 하였다.

석유 파동과 위기의 극복

대한항공의 착실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을 때인 1973년 10월, 중동 산유국들과 이스라엘 간의 분쟁으로 정치적 긴장이 높아가면서 본격적인 석유 파동이 시작되었다.

갤런당 12~3센트이던 항공유 가격이 ’74년 9월에는 45센트에 달해 각 항공사들의 연료비 부담이 네 배 가까이 늘어나게 되었다. 연료비 부담이 총비용의 10퍼센트 내외에서 계속된 유가 인상으로 30퍼센트에 가까워졌다.

게다가 미국, 일본 같은 선진국들의 경기 후퇴로 인한 항공수요의 격심한 감소도 각국의 항공사들에겐 심각한 사태였다.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 경제에 미친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주로 미국으로부터 공급받던 석유가 공급량이 대폭 감축되었고, 특히 당시의 경제 여건상 국내 수요보다 제 3국 수요에 많이 의존하던 대한항공은, 전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여객은 물론 화물 수요가 급격히 감소하여 회사의 존립이 위협받을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74년 8월 15일에는 박 대통령을 겨냥한 저격으로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희생된 안보 차원의 악재까지 겹쳐서 항공 수요는 더욱 부진해졌다.

게다가 그간의 대형기 출현으로 인한 공급 과잉에, 월남전에서 군사 수송에 투입되었던 항공기가 월남전 종료와 함께 미국의 부정기 항공사 등으로 전환되면서 기존 항공시장을 크게 잠식하는 등, 전세계의 항공업계는 이중 삼중의 타격을 받게 되어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 무렵 매일 밤낮으로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온통 기름에 관련된 것이었다고 정석은 술회한 적이 있다. 1개월 이내에 대금 결제를 해주지 않으면 항공기에 연료 공급이 중단될 정도의 곤경에 빠지기도 했다. ’73년에 새로 들여온 점보기를 담보로 내놔야 할 만큼 다급한 상황에까지 몰렸다.

당장 필요한 액수는 5천만 불이었는데,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금액이었다.

정석은 고심 끝에 업무상 인연을 맺었던 프랑스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의 로레 총재에게 지불보증을 요청하였고, 로레 총재는 두말 없이 이 거액의 지불보증을 승락하였다. 그는 드골 대통령 시절 재무상을 역임한 유능한 금융가로, 그 덕분에 대한항공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뒷날 정석은 이 은행과 합작하여 ‘한불종합금융(韓佛綜合金融)’을 설립하기도 했다.

불황기에 호황을 대비한 투자

어느 정도 고비를 넘긴 후 정석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앞날을 바라보면서 미래를 겨냥한 투자를 멈추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로 ‘불황기에 호황을 대비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는 일본에다 해외 근무 직원들을 위한 사원 아파트를 짓는 한편, DC10 항공기 세 대 등의 구매를 추진하고, 대형 IBM 컴퓨터를 도입하여 국제선 여객예약 전산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등 기재 확보와 서비스 개선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김포공항 한쪽에다 대한항공은 물론 계약을 맺은 외국 항공사들의 기내식 식음료를 조달하는 캐터링 서비스 빌딩도 세웠다.

일본항공에 앞서서 태평양 횡단 노선에 최초의 점보 화물기를 투입하여 서울-LA 노선에 취항시킨 것도 ’74년 9월의 일이었다.

당시에는 석유 파동의 여파로 인한 높은 원가와 수요의 급격한 감소 등 기업 환경의 악화로 공급력이 B707기의 세 배 가까이나 되는 B747 화물기의 운용을 꺼리는 항공사도 많았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이 없이는 발전도 없다는 민영 초기부터의 일관된 경영 전략과 화물 수송 분야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정석은 B747 화물기의 투입을 결정한 것이었다.

오일 쇼크의 위기를 슬기롭게 넘긴 대한항공은 이듬해 ’75년에 매출액 1천억 원을 돌파하였고 생산성 향상으로 약간의 흑자도 기록하였다.

세계의 대부분 기업들이 석유 파동으로 인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오히려 적극적인 해외 판매망 확장과 대형기에 의한 장거리 노선 개발에 전력을 다한 결과였다. 또한 정석의 ‘타이밍 경영’의 결실인 중동 진출과 정부의 지속적인 성장 및 수출 확장 정책에 힘입은 화물 수요 증가도 대한항공의 흑자 경영에 크게 기여했다.

‘국력 수출 루트’로서의 중동 취항

중동의 산유국들은 석유 수출로 막대한 외화를 보유하게 되자 앞다퉈 근대화, 공업화 정책을 채택, 도로, 항만, 주택 등의 근대화 사업이 외국의 인력과 기술, 자재에 의해 급속히 진행됐다.

우리나라도 월남 특수(特需)가 끝나가면서 중동 시장에 눈을 돌려,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 쿠웨이트 등 주요 산유국들에 중점을 두고서 국내 기술인력을 중동으로 대거 진출시키고 있었다.

이에 따라 대한항공은 정기 중동노선을 개설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고 교통수단의 공급은 또한 수요를 창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동 노선은 왕복 스물 일곱 시간이 걸리는 장거리 노선으로, 편도 1만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였다. 중간 국가에서의 이원권 문제 등으로 직항운항해야 하기 때문에 중간시장 수요를 흡수할 수 없다는 영업상의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를 결심한 터에 마냥 망설일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정석은 오히려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임직원들을 독려하였다.

우선 판매기반이 전혀 없는 중동지역과 그 주변 시장에서 개발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실무진을 파견하여 기초 조사를 거친 뒤, 사우디, 이란, 쿠웨이트, 시리아 등 중동 10개국에 총판매대리점을 임명하였다. 이 판매망은 후일 중동노선의 조기 개설을 가능케 한 충실한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준비 끝에 정석은 그 동안 닦아온 기반을 바탕으로 서울-바레인을 연결하는 최초의 정기여객노선을 정식으로 개설하였다. 곧 이어 2개월 뒤에는 이 노선을 스위스 취리히까지 연장하였는데, 서울-파리 간의 북극노선과 함께 한국과 유럽을 원으로 연결하는 환상(環狀)의 남북항공노선을 이루게 되었다.

당시 바레인 노선이 근간이 된 중동 노선은 뻗어나는 국력의 상징적 노선으로서 기술인력과 수출상품을 국적기로 수송하는 ‘국력 수출 루트’의 역할을 맡았다.

이어서 사우디, 쿠웨이트에도 정기노선을 개설하였다. 이 노선은 이라크, 이란, 요르단 지역으로 기술인력 진출이 점증함에 따라 활기를 띄기 시작해, 취항 직후부터 대형 기종으로 대체하여 운항하였다. 바야흐로 중동 붐이었으며, 우리 기술인력 대부분도 자국기 이용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끈질기게 붙어서 안될 것은 없다”

1979년 대한항공은 기존 한미노선 구조의 불균형 상태를 시정하고 미 동부까지 진출할 수 있는 이원권 취득을 위한 한미항공협정 개정을 위해 전력을 기울여 ‘민항 10년의 숙원’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한 가운데 뉴욕 취항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80년을 전후하여 우리나라는 2차 석유 파동의 여파에 더하여, 박 대통령 서거, 12.12사태 ,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소용돌이가 먹구름처럼 온 나라를 휩쌌다.

우선 뉴욕에서 출발할 첫 운항편부터 항공유 확보를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정석에게는 항공사 경영 10여년에 처음 겪는 황당함이었다. 간부직원을 현지로 급파해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으나, 역시 취항을 연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았다.

“기존에 취항을 하고 있는 항공사들도 기름을 줄여서 공급받는 실정이라 신규취항사로서 급유회사와 계약을 맺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렵게 이룬 취항을 연료 문제로 미룰 수는 없었다. 곰곰히 생각한 끝에 그는 “뉴욕에서만 시간을 소비하지 말고 정유회사와 직접 접촉을 해보라”고 지시를 내리고, “끈질기게 붙어서 안될 것은 없다”며 독려했다. 결국 정유회사들이 있는 텍사스로 날아가서 예상대로 거기서 최소한의 기름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아시아 국가 항공사 중 태평양-미 대륙횡단으로 뉴욕행 정기 항공로를 개설한 것은 1966년에 취항한 일본항공에 이어 대한항공이 두번째이다. 이로써 대한항공은 미국의 팬암 및 노스웨스트와 화물항공사인 플라잉타이거, 일본 항공과 함께 명실공히 ‘태평양 5대 항공사’의 하나가 되었고 뉴욕에 취항한 45번째의 항공사가 되었다.

대한항공이 세계 정치, 경제의 중심무대인 뉴욕 시장에 참여한 것은 그 자체로서 한국 정부와 민항공의 최대 숙원 달성이라는 의의 외에, 이를 바탕으로 중남미노선과 밴쿠버-토론토로 연결되는 동부 캐나다까지의 북미노선 개설을 가능하게 하고, 더 나아가 세계 일주 환상노선(環狀路線)의 완성이 한 발자국 가까웠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보아 대한항공의 뉴욕노선 취항은 한국 민항공이 새 시대로 접어 든 역사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육해공 입체수송 완성

정석에게 있어서 ‘바다’는 바로 ‘꿈’ 그 자체였으며, 넓은 세계로 이어주는 ‘길’이었다.

해방 전인 1940년대 초, 20대 초반의 젊은 시절에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을 두루 여행하면서, 그는 해운왕의 꿈을 꾸며 드넓은 세상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이를 통해 ‘이 세상에는 하늘에도, 땅에도, 그리고 바다에도 큰 길이 있다.’는 그 나름대로의 ‘길의 철학’을 정립해나갔다. 물론 당시로서는 먼 훗날 해운과 조선사업까지 하게 되리라고는 그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바다를 동경하던 젊은 시절의 꿈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것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1966년 월남에 진출한 한진상사의 업무로 월남 최대의 항구인 퀴논 항을 둘러보던 그는 철도의 기관차만한 네모 반듯한 짐짝(컨테이너)을 잔뜩 실은 미국 국적의 화물선들이 정박해서 하역 작업을 벌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갠트리 크레인이라는 특수 크레인이 무게가 무려 40톤이나 되는 이 컨테이너 상자들을 2분마다 한 개씩 부두 위에 내려놓고 있는 것이, 12명의 노무자가 한 시간 동안 작업해야 겨우 그만한 화물을 하역할 수 있었던 당시 실정을 감안해볼 때 그것은 가히 ‘해상운송의 혁명’이었다. 그는 두 시간 여 동안 꼬박 그 컨테이너 하역작업을 지켜보면서 해운의 미래는 컨테이너의 발전과 직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낙후된 우리나라 해운업을 일으켜보자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이러한 바다에의 꿈을 꾸며 창업한 것이 1972년에 한국 최초로 컨테이너선을 운항했던 대진해운이었고 오늘날 세계적인 컨테이너 선사(船社)로 발돋움한 한진해운이었다. 또한 1974년에 인천항 제2도크와 함께 민자부두를 준공했다. 공항을 비롯한 각종 물류시설 건설과 선박을 건조하는 한진중공업도 마찬가지다.

정석은 이처럼 눈앞의 이익 겨냥한 문어발식 확장이나, 남이 닦아놓은 길을 뒤쫓으며 훼방하는 얌체사업을 싫어했다. 모르는 사업에 뛰어들어 확장을 거듭하는 무모한 행동도 자제했다. ‘낚시대를 열개 스무개 걸쳐 놓는다고 해서 고기가 다 물리는 게 아니다’는 그의 말은 이 점에서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기업은 반드시 ‘국민경제와의 조화’라는 거시적 안목에서 운영해야 하며,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문어발 식으로 무작정 확장시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이다. 생전에 집무실 한 켠에 ‘수송보국’이라는 휘호를 걸어놓고 외길로 매진해온 결과, 한진그룹의 계열사들은 5대양 6대주에서 한민족의 영토를 세계로 넓히고 있다. 문어발식 확장으로 이것저것 다루었다면 결코 이루기 힘들었을 독보적인 위상이다.

대한항공공사, 해운공사의 후신인 대한선주, 대한준설공사, 대한조선공사 등, 손댈 수 없을 만큼 부실화된 국영기업체들을 자의반 타의반 인수하여 엄청난 열정을 쏟아 부어 되살려냈다. 이렇게 인수한 국영기업들도 모두 운송 관련 사업임을 볼 때, 정석이 평생 한눈을 팔지 않고 전문분야에 집중하는 외길 인생을 살아왔음을 엿볼 수 있다.

행운 기대하기 보다 판단력과 비젼 중요시

정석이 남긴 어록 중에는 기업 경영의 핵심과 세인의 의표를 찌르는 표현들이 많다.

정석은 ’행운은 남이 거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기업을 발전시키거나 위기상황에서 구하는 것은 운이나 요행수가 아니라 최고경영자의 시의적절한 판단과 결단력, 미래를 내다보는 비젼, 그리고 무엇보다 뼈를 깎는 노력만이 기업이 생명력을 잃지 않고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또한 정석은 한 걸음 한 걸음 건실하게 사업을 추진하면서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 것, 즉 ’지고 이기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비결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도난 당한 물건인데도 큰 손해를 감수하고 돈을 들여 다시 사들이는 것처럼, 당장은 손해를 보면서도 결국엔 보다 큰 결실을 거둔 많은 에피소드들은 임직원들 사이에 하나의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정석은 또한 기업은 사람이 하는 것임을 늘 강조했다. 기업은 인간의 두뇌, 인간의 능력에 의해 그 성패가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경영은 지식이나 기술만 가지고 할 수는 없다는 점도 정석은 생전에 강조했다. 기초적 지식에다 현실적인 체험을 토대로 했을 때 정확하고도 타이밍에 맞는 명석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이를 실천에 옮길 때에만 기업의 능률화는 기대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지혜와 때를 맞추는 타임 디자인에 항상 관심을 쏟아왔다.

외화획득 통한 성장 바탕으로 ‘민간외교관’ 역할

정석은 기업을 경영하면서 국제적인 활동 무대를 기반으로 국가에 보탬이 되는 ‘민간외교’ 수행에 늘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정석은 우리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광화장’을 비롯 국내외에서 여러 훈, 표창을 받았다. 특히 ‘레종 도뇌르 그랑 오피시에’와 같은 최고 권위의 프랑스 훈장을 네 차례나 받는 등 ‘민간외교관’으로서의 역할에 남다른 노력과 자부심을 보여줬던 정석이었다.

대일 차관 교섭이라든가 에어버스 구매를 통한 외교적 뒷받침 등이 그러하며, 88 서울 올림픽 유치 활동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1981년 바덴바덴에서 우리측 대표는 올림픽 유리를 놓고 일본 나고야와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정부는 남덕우(南悳祐) 전 총리를 단장으로 한 경제사절단의 일원으로 스칸디나비아에 출장 중이던 정석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프랑스 IOC위원들이 한국을 지지하게끔 책임지고 설득해 달라는 것이었다.

정석은 ’73년부터 한불경제협력위원회 한국측 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했고, 여러가지 인연이 있어 프랑스의 저명인사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에어버스 항공기를 처음으로 구입하게 된 이래, ’77년에는 프랑스 일등공훈 국가훈장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다보니 여러 모임에서 웬만한 유명인사들은 대부분 만났던 적이 있었던 터라 정부가 그에게 부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석은 우선 일본 나고야로 날아갔다. 거기에서 올림픽 유치를 반대하는 유인물들을 수집하고 몇 가지 준비를 한 뒤에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그는 프랑스의 IOC 위원들을 만나 일본 내에서는 나고야 시민들이 올림픽 유치를 반대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한국 지지를 요청하였다. 정석은 개발도상국인 한국 유치에 반대 입장을 견지하던 에로조그 씨를 세 번이나 찾아가는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야 겨우 우호적인 대답을 받아낼 수 있었다.

바덴바덴에서 우리측 유치대표단과 합류한 정석은 아프리카 리비아의 대표인 아따라불시 씨도 서울의 올림픽 유치를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숙소까지 방문하여, “같은 개발도상국으로서 협력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런 기회에 결속을 다져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 마침내 아따라불시 씨도, 아프리카 지역 올림픽 연합회 IOC 위원들과 협의해 보겠다고 긍정적인 언질을 주었고, 다음날 총회 석상에서 그는 하룻만에 태도를 바꾸어 88올림픽의 서울 개최를 강력히 지지하는 발언까지 해주었다. 이것은 88올림픽 개최지가 서울로 확정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석의 민간외교관으로서 활동에 대한 남덕우 전 총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조 회장은 민간기업으로서 민간 경제외교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해왔다, 그는 자기가 한 일을 남에게 선전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 같지는 않으나, 나는 나의 직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사례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일본, 프랑스뿐만 아니라 중동 산유국, 중국, 월남, 대만, 그리고 몽골에 대해서도 민간외교 활동을 해왔던 것으로 안다. 항공사업을 경영하고 있는 만큼 다각적인 외교활동이 비교적 쉬운 점도 있겠으나, 그는 언제나 국가이익을 염두에 두고 정부와의 긴밀한 협조를 마다하지 않았다.

1970년대 초 포항제철 건설을 위해 일본 정부와 차관교섭을 벌이고 있을 때에도 조 회장이 막후에서 움직인 일이 있었고, 1978년 내가 프랑스 정부와 원자력 발전 사업을 교섭하고 있을 때에도 한불경제협력위원회 회장으로서 측면에서 협조해준 일도 있다.

88서울올림픽 유치에도 크게 한몫 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 바치는 기업가이다.”

육영사업 등 사회에 대한 기여에도 큰 관심

기업이 사회 복지 증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방법 중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바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라는 게 정석의 평소 지론이기도 했다.

그러한 취지에서 1968년 인하학원을 인수했으며, 1979년에는 정석학원을 설립, 학교시설의 확충과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최대한 재정 지원을 해왔다. 특히 정석고등학교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돌산을 깎아 교사를 건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젊은 학생들이 인천 시가지와 인천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호연지기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정석은 2년여에 걸친 교사 신축공사 기간 중 거의 매주 현장에 내려가 직접 감독을 할 만큼 애착을 가졌다.

정석은 먼 장래를 내다보는 투자로는 육영사업만한 것이 없다는 믿음으로 사학 운영에 헌신해왔다. 그가 관심을 쏟고 있는 그룹내의 학교법인으로는 1968년에 인수한 인하학원(仁荷學園)과 ’79년에 설립한 정석학원(靜石學園)이 있다. 이 두 재단에 속한 학교로는 인하대학교 및 부속 중고등학교, 인하공업전문학교, 한국항공대학교, 정석항공공업고등학교 등이 있다.

정석은 후학을 양성하는 사학재단 운영에 헌신하면서 자신도 세 개의 명예박사학위를 갖게 되었다. 첫 학위는 ’72년 봄 대만의 중화학술원(中華學術院)에서 취득한 것으로 명예철학박사 학위였고, 두 번째는 ’87년 프랑스 루앙대학에서 수여한 명예경영학박사 학위였다.

’95년 4월에는 한국해양대학교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정석에게는 외국의 어느 유명 대학에서 받은 것 보다도 뜻깊은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일찌기 소년 시절에 바다로 향한 꿈을 안고 정규학업을 중단한 채, 해양대의 전신(前身)인 진해 해원양성소(海員養成所)를 다닌 적이 있어 모교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간의 어지간한 기업인이라면 상경계의 명예학위는 하나쯤 다갖고 있어도 공학박사는 희귀한 일이었다. 정석은 사업을 경영하면서도 스스로 전문기술인이라는 생각을 늘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학박사라는 학위는 그에게 자부심을 더해 주었다.

그리고 해운산업과 관련한 전문 분야의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교육기관에서 해운과 수송 사업에 대한 그의 일관된 집념과 성취를 그 공적으로 인정해 줬다는 점이 그에게는 이 명예 공학박사 학위가 남다른 또 다른 이유였다.

정석은 자신이 체계적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 하여 직원들의 능력 개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가정 형편상 대학 과정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입사해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일하면서 배우는 자기 계발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1988년도에 사내 산업대학을 개설하기도 했다. 매년 졸업식에 만사를 제치고 참석하여 식을 주관할 만큼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정석은 또한 1991년에 ’21세기 한국연구재단’을 만들어 제주도의 목장 부지를 비롯한 상당한 재산을 기부하여 각종 장학사업을 지원했다.

땅 한 평에서 돌 한 트럭

제주도의 제동목장 부지는 한진그룹이 당초 제주도에 비행훈련원을 설치하고자 1971년 4월 북제주군 조천면 교래리의 63만 7천여 평과 남제주군 표선면 가시리의 358만 4천여 평을 매입한 것이다.

정석이 이 땅에 조종사 훈련장을 세울 생각에 몰두하던 무렵, 정부에서는 ‘축산입국(畜産立國)’의 표어 아래 강력한 낙농정책을 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석은 기왕에 제주도에 매입한 이 황무지를 기계화를 통한 현대적인 대단위 기업 목장으로 개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곳을 목장으로 개발하는 데는 화산으로 이루어진 황무지의 돌을 추려내고 초지를 조성해야 하는 일이 큰 문제였다. 길은 고사하고 출입조차 힘든 돌 투성이 땅이었다. 한 평의 땅에서 한 트럭의 돌을 실어내는 작업이었다. 워낙 돌이 많아 불도저 같은 기계를 제대로 들이댈 수도 없었다. 포크레인과 사람의 힘에만 의존해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하루 종일 돌을 파내도 한 사람이 한평 땅도 일구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좁은 국토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쓸모 있는 땅 한 평이라도 만들면 그것이 곧 국토를 넓히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우선 5.16도로에서 목장에 이르는 20리(9Km)가 넘는 진입로를 닦았다.

목장을 조성하던 초창기에는 수십억 원이 투자되었고 연인원 5만여 명이 동원되었다. 시설 투자도 계속 추진하여 사일로, 축사, 풍력발전기, 트랙터 등 우리나라 최대, 최고의 대단위 기업 목장으로 손색없는 면모를 갖추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제동목장(濟東牧場)은 ’74년에 정부의 대단위 기업목장 승인을 받았고, ’76년에는 정석이 농수산부 장관의 축산진흥 공로표창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20여 년에 걸쳐 땀으로 일구어 놓은 이 일대의 땅이 비업무용 부동산으로 판정되어 처분해야만 했을 때, 정석은 이 땅이 가치 없는 토지로 변질될 것을 우려, 매각하지 않고 후세를 위한 사업에 기부하기로 결심하고 대부분 장학재단에 기증했다.

당초 이 땅을 구입한 의도대로 대한항공은 제동목장의 초지 외곽 일부를 임차하여 조종사 양성을 위한 비행 훈련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제주에 비행 훈련원이 생기기 전까지 우리나라에는 민간 조종사 양성을 위한 기초훈련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조종사 양성은 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 출신의 경우 민간 항공에서 요구하는 기능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이들의 재교육에도 별도의 시간과 경비가 투여되었다. 제주 비행 훈련원은 이런 비효율을 없애고 자체 훈련으로 조종사를 양성하여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조종사를 공급하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예비 공군을 양성한다는 취지로 설립되어 뜻깊게 활용되고 있다.

조종사 양성을 위해 활용 가능한 부분에 대해서 자신이 소유했던 땅에 임대료까지 지불하면서 꾸준하게 시설투자를 계속하여 세계적인 규모의 비행 훈련원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것이다.

사업을 예술이라 믿은 수송업계의 큰 별이자 거인

정석은 ‘사업은 예술’이라고 믿었다. 예술작품이 조화와 균형, 개성과 창의력이 있어야 비로소 가치를 지니듯, 기업도 국민경제와의 조화를 이루며 국민들의 복지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하며, 창의와 열정의 뒷받침이 있어야 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예술가에게 정년이 따로 없듯이 기업인에게도 정년이 따로 정해질 수 없다’는 신념으로, 와병 중에도 집무실에 자주 나와서 주변을 정리해왔다.

예술작품을 창조한다는 마음으로 기업을 가꾸고 발전시켜 우리 국가 국민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 하는 한진그룹을 만드는 일, 명실상부 세계적 종합물류 그룹으로서 고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나아가 기업으로서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 일에 마지막까지 전력을 기울여 온 것이다.

그것이 기업예술가로서 평생을 일관해오며 수송업계의 ‘큰 별’이자 ‘거인’으로서 역할을 해온 그의 소망이었던 것이다.

땅과 바다와 하늘의 길을 안전하고 정확하게 인도하여 우리 경제와 문화와 삶의 공간을 확대시키고자 했던 정석 조중훈. 사람들은 정석이 땅과 바다와 하늘에 개척해 놓은 길을 밟으며,‘수송사업은 인체의 혈맥과도 같다’는 지론을 펼쳤던 그의 식견과 개척정신에 경의를 표할 것이다.

[김백순 | 월간조선 발행 ‘기업인 열전’- 한진그룹 창업자 趙重勳 | 필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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