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5] 무굴제국 멸망 후의 인도

[인도-5] 무굴제국 멸망 후의 인도

예나 지금이나 국가지도자의 좁은 시야와 사리분별 없는 아집은 나라를 어렵게 한다. 재정 형편 고려하지 않고 ‘폼 나는’ 건축에 몰두하던 샤 자한 황제는 아들에 의해 퇴위 당했다.
황제가 된 아들 아우랑제브(재위 1659~1707)는 수도를 아그라에서 델리로 옮기고, 스리랑카를 제외한 남인도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허울뿐, 실제론 여전히 어수선했다.
악화된 재정, 종교적 갈등, 이슬람 세력 중심의 편향에 열 받은 힌두교와 시크교도들의 반발이 겹쳤다. 1707년 90세의 아우랑제브가 후사 문제도 정리 못한 채 사망하자, 황위를 둘러싼 암투까지 겹쳐 제국은 극도로 혼란해졌다.

빅토리아 여왕과 인도제국

이러한 틈에 영국은 1757년 벵골-프랑스 연합군과의 전투 승리를 계기로 벵골지역 내에서 주도권을 쥐고, 대륙 내의 번왕국(藩王國; 토호국 비슷한 개념)들을 하나하나 투항시키며 세력을 넓혀갔다. 그나마 19세기 전반까지 영국의 피보호국 무굴은, 명목상 다른 번왕국 윗자리로서 황제의 권위는 인정받았다.

이런 와중에 영국계 동인도회사에 고용된 용병(Sepoy)들이 항쟁을 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은 이 ‘세포이의 항쟁’이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가 배후라는 이유로 폐위시켰다. 무굴제국이 330년만에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1857). 조선시대로 보면 철종 8년 때였다.
남인도, 스리랑카 및 현재의 미얀마 지역까지 병합한 영국은 1877년 인도제국을 성립시키고 영국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1819~1837~1901)이 인도제국의 왕을 겸한 것이다.

강화도에서 빈농으로 지내다가 왕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어 엉겁결에 왕이 된 철종 등극 과정, 대영제국에서 역시 직계에 후사가 없어 선왕의 여조카인 빅토리아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 사연, 어리고 가냘펐던 여성이 카리스마를 쌓으며 역사상 가장 화려한 전성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64년이나 이끌던 스토리 등은 한 편의 드라마다.

인도의 독립과 마하트마 간디

뜻하지 않게 1차세계대전(1914~1918)에 휩쓸린 영국은, 인도의 전쟁협력 대가로 ‘전쟁 후 자치 허용’을 약속했다. 이게 지켜지지 않자, 인도인들은 독립 쟁취를 위해 저항하였고 그 중심에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가 있었다.
좋은 가문 출신의 간디는 영국 유학- 변호사- 남아공 생활을 거쳐 인도로 돌아와 활동하던 중, 1918년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 역할을 맡으며 투쟁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인도는 우리보다 딱 2년 뒤인 1947년 8월 15일 독립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 됐듯이 분리된 독립이었다. 힌두교 중심의 인도, 이슬람교의 파키스탄, 불교의 스리랑카로 나뉘었다가, 뒷날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독립한 것이다.

뭄바이 ‘간디의 집’ 서재에서 일행들과…..

독립 시점까지 종교 갈등을 빚고 있던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융합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온 간디는 1948년 1월, 반(反)이슬람파 청년이 쏜 총탄에 희생되었다. 우리 나이로 80세 되던 해였다.

당시 간디가 살던 아담한 3층집에는 서재, 물레와 생활 도구들이 그대로 보존돼있다. ‘위대한 영혼’이란 뜻의 ‘마하트마’는, 1922년 간디를 방문한 타고르가 헌정한 것이라고 한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에 대한 신념을 그의 자서전에서 엿볼 수 있다.
“….. 군사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하여 도망가는 장군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게 가장 귀한 비폭력의 무기를 주셨다. 만일 내가 오늘의 위기에서 그 위대한 무기를 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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