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춘천 청평사

숲과 계곡 전부를 사찰 경내로 삼았던 선사(禪寺)– 청평사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뻗다가 강원도 미시령으로 한 갈래 빠져 나와 춘천 부근에서 오봉산(五峰山)으로 솟았다.
본디 이름은 경운산(慶雲山),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청평산(淸平山)이라는기록도 있다고 한다.
비로봉, 보현봉, 문수봉, 관음봉, 나한봉 등 다섯 봉우리가 있다 하여 오봉산이라 붙여졌다. 기암괴석과 빼어난 경관에 더하여 산자락 한 끝을 맑은 소양호에 담근 운치 있는 산이다.

청평사 입구는 계곡과 나란히 이어지는 숲길이다. 길가에 바로 접해 있는 구성폭포(九聲瀑布)는 8~9미터 높이쯤 되는 우뚝 선 큰 바위에서 내리 꽂는 시원스런 물줄기와 파란 못이 볼거리다. 폭포수 소리가 아홉 가지로 들린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숲길로 걸어 들어가다 뒷 쪽을 돌아보면 활처럼 굽은 길을 따라 오르는 사람들이며, 산 아래 풍경이 서울 근교라고 믿기지 않는다.

고려 때 처음 세워진 유서 깊은 절

청평사(淸平寺)가 처음 세워진 것은 973년 (고려 광종 24년). 영현선사(永賢 또는 承玄禪師)가 창건할 당시엔 백암선원(白岩禪院)이라 했다가, 1068년 (문종 22년)에 춘천도감창사(春川道監倉使)였던 이개가 중건하여 보현원(普賢院)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그 후 이개의 장남 이자현(李資玄)이 벼슬을 버리고 대를 이어 머물면서 중수를 하여 문수원(文殊院)이라 고쳤다. 청평사라는 이름은 1550년 (조선 명종 5년)에 보우선사(普雨禪師)가 다시 중건하고  만수청평선사(萬壽淸平禪寺)라 고쳐 부른데서 유래한다. 고려 공민왕 시절엔 당대의 고승 나옹화상이 머물렀으며, 조선시대에는 매월당 김시습이 서향원(瑞香院)을 짓고 은둔했던 유서깊은 절이다.

전성기 때는 221칸이나 되는 큰 규모였다고 전해지지만, 대부분 소실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대표적인 흔적은 삼층석탑과 영지(影池) 등이다.

역사나 문화 예술을 얘기할 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영지’라는 연못도 그러하다.사다리꼴 모양의 볼품 없는 듯한 연못이지만 천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인공 연못으로 그 의미가 깊다.

산 그림자 담는 연못과 고려정원으로 유명

청평사를 중건한 이자현은 높은 산과 가파른 계곡을 돌로 쌓고 다듬어 산기슭 전체를 사찰 경내로 삼고자 했던 것 같다. 누석식(壘石式) 정원을 기본으로 청각적 효과를 위한 수구식(水溝式) 정원, 평지의 정원(平庭)과 계곡에 자리한 정원(溪庭), 산 속의 정원(山庭) 등 자연 경관과 지형을 살려 수도하는 분위기에 어울리도록 설계했다. 계곡에 수로를 만들고, 물길을 끌어들여 물레방아를 돌리고 연못을 파서 오봉산 그림자가 비치게 했다. 이것이 오늘날 가장 오래된 고려정원의 전형으로 전해지는 ‘문수원 정원'(속칭 高麗庭園)이다. 이자현이 공사를 하는 동안 도적떼와 호랑이가 자취를 감췄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엔 궁원(宮苑)을 비롯해 당대의 권력 귀족층이었던 김치양, 최충헌, 최우 등이 화려한 정원을 꾸몄으며, 기록상으로는 김치양의 정원이 가장 빠른 것이지만 현재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이곳 문수원 정원이 당시의 형태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정원으로 꼽힌다.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정원은 최소한의 인공만을 가하여 자연의 멋을 최대한으로 살리고 주변 경관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꾸민 것이 특징이다.

영지의 규모는 북쪽 변 16미터, 남쪽 변 11.7미터로 뒤쪽이 약간 넓은 사다리꼴이다. 남북간 길이는 19.5미터. 연못 속에 큰 바위 세개를 놓아 단순하면서도 입체적인 변화감을 더해 주고 있다.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연못”이라고 1981년 학술조사에서 밝혀졌다.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사이호사(西芳寺) 정원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이다. 맑고 깨끗한 물에 산그림자가 비쳐진다 하여 영지(影池)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영지 위쪽에 있는 다 쓰러져가는 물레방앗간 역시 이자현의 손때가 묻은 고려정원의 잔영이다. 이 정원(고려정원)의 나머지 부분은 시간이 흐르며 그냥 자연 속에 묻혀버렸지만, 아직도 주위에서 흔적은 찾아볼 수 있다. 청평사 입구 구성폭포 아래의 거북바위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여 절 뒷편인 청평선동(淸平仙洞) 계곡까지의 약1킬로미터가 정원 영역으로 추정되며, 영지는 그 중심에 위치한다.

상사뱀으로 환생한 전설 깃든 석탑

청평사 아래 구성폭포 위 쪽에는 슬픈 전설이 얽혀 있는 삼층석탑이 서있다. 개울 건너 산등성이에 올라 앉아 첩첩산중을 뚫고 빠져나가는 골짜기와 봉긋봉긋 둘러선 아득한 산봉우리들을 바라 보는 위치다.

당나라 공주를 사랑하던 한 청년이 당 태종의 노여움을 사 처형당한 뒤, 상사뱀으로 환생하여 공주의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더란다. 공주는 점점 야위어 갔으나 달리 해결방법이 없었다. 여러 사찰을 찾아다니며 불공도 드렸지만 허사였다. 이때 신라에서 온 스님의 말씀을 듣고 공주는 이곳 청평사까지 오게 되었다. 공주가 지금의 석탑 부근에서 여장을 풀고 “절에서 밥을 얻어 올 테니 몸에서 내려올 수 있겠습니까”하고 뱀에게 물었더니, 상사뱀이 몸을 풀고 내려가더란다. 절에서는 마침 가사불사를 하던 중이어서 공주는 가사를 꿰맨 뒤 법당에 들어가 기도를 했다.

밖에서 기다리던 뱀은 시간이 지체되자 공주를 찾아 나섰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계곡물이 불어나 절 문으로 들어서려던 뱀을 쓸어 가버렸다.

법회를 마치고 돌아온 공주는 죽어 있는 뱀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한편으로 시원하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했다. 공주의 아버지 당 태종은 이 소식을 듣고 금덩어리 3개를 보내 법당을 건립토록 했고 공주는 삼층석탑을 세우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며 얼마간 머물다가 돌아갔다. 이 탑을 공주탑이라고 부르는 전설의 내력이다.

사찰의 탑이 대개 중심 건물인 금당 앞마당에 세워지는데 비하여 이 탑은 길목에 홀로 서있어 전설을 실감나게 한다. 이렇게 사찰 마당을 벗어나 세운 탑은 그리 흔치 않으며 원탑(願塔) 또는 공양탑(供養塔)이라고 불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3층으로 된 탑신과 이중기단(二重基壇)의 형태는 통일신라 탑의 특색이라고 풀이되나, 이 절이 973년에 창건된 사실로 볼 때 고려 초에 만들어진 신라양식의 탑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한다. 탑의 꼭대기를 장식하는 상륜부(相輪部)가 없어져 높이는 3미터쯤 된다.

윤회 전생을 깨우치게 하는 회전문

전설대로라면 뱀이 들어가려 했던 문이었을 ‘회전문(廻轉門)’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문이 아니라, 중생들에게 윤회 전생을 깨우치기 위한 ‘마음의 문’이다. 보물 16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사찰에는 입구의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사천왕상을 모시는 천왕문(天王門), 그리고 뒷면의 해탈문(解脫門) 등, 보통 세개의 문이 있다. 청평사 회전문은 사찰의 중문으로 천왕문에 해당한다. 청평사에는 현재 별도의 일주문은 없다.

회전문과 대웅전 양 옆에 크고 작은 회랑과 전각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을 법한 정교한 축대와 초석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전성기 때의 청평사 규모를 가늠케 한다.

구성폭포와 영지를 지나는 길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소양댐이 건설되면서 육로가 없어져 청평사를 찾은 연인들은 배가 끊기면 하룻밤 묵을 수 밖에 없어, 응큼한 남정네의 데이트 코스로 애용됐던 오봉산. 그러나 지금은 화천 쪽에서 길이 뚫려 굳이 배를 타지 않고도 청평사로 들어갈 수 있으니 세상사 자체가 윤회는 윤회다.

[김백순 | Morning Calm 2001년 12월호 | 필자 게재 | 2019.0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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