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명상] 북촌 별궁길 산책

북촌은 현재의 지명으로 종로구 재동·가회동·안국동·화동·삼청동 등에 걸쳐 있던 마을이다.
조선말기 학자 황현(黃玹)이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까지 46년간의 역사를 서술한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불렀다고 한다.
종각 남쪽 남산 기슭을 중심으로 한 남촌에는 주로 관직에 오르지 못한 양반들과 하급관리·상인들이 모여 살던데 비해, 왕족이나 권세 있는 양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었다. 요즘에는 율곡로의 북쪽. 있는 율곡로의 북쪽, 경복궁과 창덕궁의 사이 지역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경복궁 옆 현대미술관으로 이어지는 길….
근대역사의 숨결을 반추하며 무상/고/무아의 명상을 하며 산책하기에 제격이다.  2019년 3월 11일 오후 Y포럼 참가자들과 처음으로 시도해본 코스 요약이다.

안동별궁 터에 민영휘의 부실이 세운 풍문여고


별궁길은 안국역 1출구 옆길에서 안동교회 쪽으로 난 길이다. 고종 18년에 세워져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결혼한 안동별궁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1884년 갑신정변 때 화재가 나서 타버리고, 해방 직전, 풍문여학교로 개교를 했었다. 풍문여고는 현재 강남 내곡지구로 이사하여 남녀공학이 되었고 앞으로 서울공예박물관으로 쓰여질 예정이다.

명성황후가 이름 붙인 ‘감고당’ 터의 덕성여고

이 자리 북서쪽으로 지금의 덕성여고 자리에 감고당(感古堂)이 있었다.
조선 19대 임금 숙종이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에 지어주었는데, 뒷날 장희빈과의 알력으로 폐위된 후 이곳에서 5년쯤 거처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살던 어린 시절의 명성황후가 1866년(고종 3) 이곳에서 왕비로 책봉되었다고. 과거 인현왕후의 일을 회상하여 ‘감고당(感古堂)’ 이란 이름을 붙인 것도 명성황후였다. 이 자리에 있던 감고당 건물은, 덕성여고가 들어서면서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 학원장 공관으로 옮겨졌다가, 여주시 명성황후의 생가터 옆에 복원되었다.

여성운동의 선구자 차미리사(車美理士, 1879~1955)를 생각하며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난 ‘섭섭이’는 열일곱에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3년 만에 남편 김씨와 사별했다고 한다. ‘미리사’는 기독교 세례명에 남편 성을 따라 ‘김미리사’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했다.

남편 사별 후, 스물 셋의 나이에 중국 상하이 유학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언론활동, 교육, 독립운동 등에 열성을 쏟았다. 미주리주 캔자스시에서 스캐리트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후 1912년에 귀국했다. 배화학당 교사로 사감을 맡았다가 3.1운동 다음 해인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산하에 부인야학강습소를 설치했다. 여성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자생적 여성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차미리사가 주된 교육대상으로 삼은 여성들은 대부분 적령기를 지나고 배움의 기회로부터 소외된 가정부인들이었다. 또한 여성들로만 구성된 전국 순회강연회를  조직하여 가정부인들을 대상으로 낡은 관습 타파, 생활개조, 남녀평등 등을 고취하는 계몽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모은 성금으로 청진동에 사옥을 마련하여, 부인야학강습소를 세웠는데, 근화학원-근화여학교-근화여자실업학교로 변경되었다가 무궁화 뜻을 가진 ‘근화’를 트집잡는 일제의 압력으로, 1938년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개명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재정난이 심해져 1940년 송금선(宋今璇)이 학교의 운영을 맡아, 같은 해 8월 교장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 1945년 10월 재개교하였다.

개화파 몰락한 집터의 옛 경기고등학교 터

1900년 경기고등학교 전신인 관립중학교 설립된 당시의 학교터는 김옥균(金玉均)의 주택지였다. 이후 서재필과 박제순의 집터가 합쳐지면서 꽤 넓은 부지가 되었다. 1884년(고종 21)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대부분 일본으로 망명하여 이들이 소유한 집들을 조선 정부가 몰수한 것이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경기공립중학교 -경기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과정은 우리 공공교육의 변천사를 상징한다.

1938년에 경기공립중학교로 학교 이름이 바뀌면서 신교사로 낙성된 건물 본관은, 당시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벽 구조, 스팀 난방시설을 갖춘 3층 최고급 학교 건축물로서, 우리나라 관학 중등교육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의미도 있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가 옮겨가고 지금은 시립 정독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입구에는 서울교육박물관도 있어 학창시절의 추억도 더듬어 볼 수 있다.

웃으며 마음 비우란 소허당(笑虛堂)

별궁길과 감고당길이 만나는 골목에 근대사를 지켜본 두 건물이 마주보고 있다. 안동교회와 윤보선 고가다.

종로구 안국동 27번지의 안동교회는 1909년에 양반들이 모여 만든 평신도들이 세운 첫 교회로,  현재 예장통합측 장로 교회다.

주시경 선생이 주도했던 안동교회 앞 쪽에 있는 조선어학회 터

초대 목사는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인 한석진 목사. 1909년 박승봉, 김창제, 유성준의 가족들이 북촌마을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 일제강점기에 이운제 같은 독립운동가 배출. 해방 후 해위 윤보선 대통령 같은 정치가를 배출. 서울의 중심 북촌에서 100년 동안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격변과 해방 후 정치 변화의 중심지에 서 있었다.

윤보선 대통령도 다닌 교회 본당 옆에 한옥 별채가 있다. 안동교회에서 교인들에게 공모해 정한 이름, 소허당(笑虛堂) 이라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체를 집자한 것이란다. 자그마한 중정과, 바깥으로 툇마루를 낸 한옥. 웃으며 마음 비우란 뜻 아닌가? 평일에 무료 문화 강좌가, 1년에 10여 차례 교회 음악 중심의 오르간 연주회가 열리기도 한다.

윤보선 가옥

고종 7년(1870) 건립,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친이 1910년경 매입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박영효 선생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고.
윤보선 전 대통령은 7~8세경에 이곳에 살기 시작하였으며 대통령으로 재직할 당시에도 청와대가 아닌 이곳에서 집무를 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정당인 한국민주당의 산실 역할을 한 장소이고 1950~1970년대 야당의 사무실 겸 회의실로 사용되었으며 민주운동의 본부이자 피난처로 사용되기도 한 한국정치사적 의의가 큰 곳이다.

140여 년 전의 양반가옥으로 민가 최대라는 99칸이란다. 목조 기와지붕은 전통 건축,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안채, 대문 및 행랑채, 창고 등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 뒤뜰에 연못이 있고 매화, 향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가 전통 조경은 아니지만 19세기 말 새롭게 조성된 근대 조경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구한말 세도가의 위용과 건축 양식 및 주거의 변천과정 알 수 있는 건축 문화사적인 면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한다. 사적 제438호지만 비개방 가옥이다.

국립현대미술관

1969년 경복궁에 개관했다가, 덕수궁 석조전을 거쳐, 1986년 과천으로 이전했다.

1998년 옛 덕수궁 자리에 다시 분관, 2013년 경복궁 건너편 소격동(북촌) 기무사 터에 세번째 전시관 서울, 2018년에 청주관을 개관했다.
과천관은 건축/디자인/공예 위주. 덕수궁관은 역사의 숨결 느껴지는 국내외 근대 미술 위주로 전시한다. 서울관은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 기획전으로 운영된다. 청주관은 작품 수집과 보관 위주다.

민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가 40대 초반의 나이에 설계했다는데, 2010년대 신축 3대건물에 대해 이런 평가도 있다.

“… 찌그러진 유리 온실 모양의 서울시청, 괴물을 연상케 하는 DDP는 ‘일제시대 유물 청산’이라는 사회적 구호에 등 떠밀리고, 설계와 건축 입찰비리 척결에 몰두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건축물’이 아닌 날림의 ‘건물 덩어리(혹은 더미)’를 만들어 버린 반면, 국립현대미술관은 주위의 경복궁, 북촌의 한옥집들을 공경하고 조화를 꾀하면서도 반듯하도 넓직한 개방감을 이루어냈다….”

[사진: 양철배작가, 옥우석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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