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와 인천의 근대문화유산

제물포와 인천의 근대문화유산

제물포역에서는 제물포가 너무 멀다
서울-인천 연결 전철역 중 하나인 ‘제물포’ 가까이에 같은 이름의 포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실제로는 인천역 일대가 제물포에 더 가깝다. 인천역 바로 앞에 있는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인천항, 19세기 말 세워졌던 은행 건물 등이 그대로 보존된 개항장거리 일대에 해당된다.

1928년 발표된 염상섭의 장편소설 “이심”에 묘사된 이 일대의 당시 분위기는 이렇다.
“….. 자동차는 사람이 장날같이 복작대는 해안을 한 바퀴 돌아서 만국공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오늘은 여기도 사람의 떼로 우글거린다. 중등학생의 떼며 여학생들의 행렬도 앞에 보인다. 아마 이 학생들도 음악회 구경하느라고 몰려 들어오는 모양이다…..”

부산(1876), 원산(1880)에 이어 세 번째로 1883년 1월에 개항된 제물포 일대에는 외세에 대한 임대구역이랄 수 있는 조계(租界), 즉 일본 및 청국 전관거류지와 각국공동거류지가 설정돼 있었다. 청국과 일본전관거류지에는 자국 영사관을 중심으로 구획된 대지 위에 1~2층의 상가주택이, 서양 각국거류지에는 사택, 별장 등 서구풍 건축물이 들어섰다. 

거대한 스트리트 뮤지엄으로 변신
20세기 후반 인천이 광역시로 성장하기까지 도시 겉모습이 확장되고 개발되면서 눈길을 끌지 못했던 이 지역은, 2000년대에 들어서 근대도시 인천의 정체성과 역사를 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문화역사지구로 조성되었다. 옛 일본인거류지였던 현재의 중구청 앞 도로변에 면한 건물의 입면을 일본풍으로 장식하여 개항기 일본거리로 재현되었다.
가급적 과거의 유산을 보존하되 현재적 가능성을 재해석함으로써 거대한 스트리트 뮤지엄으로 변신하고 있는 것이다. 밀려들어온 외세의 자취라는 이성적 판단을 잠시 접으면, 누군가의 표현대로 뉴욕 브루클린의 오래된 항구도시 비슷한 정취도 느낄 수 있다. 옛 물류창고를 개조한 예술문화 공간과 허름한 작업장, 컨테이너가 드나들던 포구와 철로가 뒤엉켜 있는 분위기 등이 그러하다.

청국거류지에서 1983년 문을 닫은 원조 ‘공화춘’이 짜장면박물관으로 변신하는 등, 번화한 패루와 붉은 간판이 집중된 ’차이나타운’으로 재생되어 있다.
배후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는 인천항을 내려다볼 수 있다.

조계 내 외국인들이 상호 교류를 위해 설립한 제물포구락부(현 인천문화원연합회), 구인천부청사(현 인천중구청), 일본제1은행지점(현 인천개항박물관) 을 비롯한 일본계 은행 건물들, 대한성공회 내동교회, 천주교 답동성당, 구인천우체국(현중동우체국) 등 근대건축물들이 제법 온전하게 남아 활용되고 있다.
또한 구일본우선주식회사를 비롯한 항만창고 등 13개동의 건물군은 창작스튜디오, 공방, 자료관, 교육관, 전시장, 공연장 등,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 ’인천 아트플랫폼’으로 변신하였다.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한국근대문학관
인천아트플랫폼과 나란히 세워진 한국근대문학관은 낡은 창고 건물의 투박한 외벽과 내부 목조 천장을 살린 문학박물관으로 재조성한 곳이다. 3만 점 가까운 자료들 가운데는 최초의 국한문 혼용서인 유길준의 [서유견문] 초판, 염상섭의 [만세전] 초판 등도 있다. 최남선, 한용운, 김소월, 나도향, 현진건, 백석, 염상섭 등 1890년대 계몽기부터 1940년대 후반까지 시대별 문학의 변천사와 주요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다.
국내에 60여 곳의 문학관이 있지만, 특정 문인과 유파를 떠나 근대문학을 총망라한 문학관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제물포 개항 역사적 배경은 강화도조약과 임오군란
18세기 산업혁명의 결과 과학기술이 혁명적으로 발전한 19세기의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발적인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당시 ‘쇼군’ 주도 막부(幕府)시대에서 왕정복고로 천황 친정체제를 마련한 1865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과 더불어 근대국가로의 발전을 이루며, 일본은 서서히 ‘조선’에 압박을 가해 왔다. 명분은 ‘근대적 국교 관계를 맺기 위한 교섭’이다.

조선은 그 무렵 하야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쇄국양이(鎖國洋夷) 정책’을 지지하던 척사위정(斥邪衛正) 세력이 쇠퇴하고 대외 개방을 주장하는 개화 세력이 자라며, 외세와 더 이상 통교를 거절하는 것은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 세를 키우고 있었다.

이러한 내외정황을 간파한 일본은 당시 한양의 관문이랄 수 있던 강화도에 운요호[雲揚號]를 출동시켜 우리측 연안 포대의 포격을 유발했다. 또한 이 사건을 빌미로 교섭을 압박하여, 1876년 음력 2월 3일 소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丙子修好條約; 江華島條約)을 체결하였다.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제1조)”는 조항에 이어,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해야 한다(제5조)”, “조선은 연안 항해의 안전을 위해 일본 항해자로 하여금 해안 측량을 허용한다(제7조)”,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 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제10조)”, “양국 상인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추후 통상 장정을 체결한다(제11조)”는 내용 등이 삽입되었다.

청국과 일본 그리고 제물포조약 
부산, 원산과 함께 인천을 개항하게 됨으로써 조선이 세계에 문을 여는 계기였으나, 일본 침략의 시발점이 되는 큰 사건으로 이어졌다. 인천은 우리측의 유예요청으로 인해 6년간 시간을 벌었으나, 1882년의 임오군란을 계기로 상황이 급변한다. 
일본은 피해보상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공사를 파견하며, 군대의 시위 아래 제물포에 상륙했다. 이에 청나라는 속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사를 출동시키는 한편 사태진정을 위해 조선과 일본 간의 ‘제물포 조약’을 묵인했다. 조선 측의 사과와 배상, 일본 공사관의 일본 경비병 주둔, 임오군란 주모자 처벌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렇게 1883년도에 개항된 항구의 이름이 제물포(濟物浦)다. 외세가 들어왔던 포구 주변의 개항장 일대가 ‘제물포’라는 공간적 영역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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